모든 사람을 위한 성경 묵상법/ 김기현/ 성서유니온
<묵상을 재정의하라>
묵상은 소리 내어 읽기입니다.
묵상이 무엇인가에 대한 가장 훌륭한 대답은 시편 1:2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흔히 묵상이라고 할 때의 묵상은 이 구절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편에서 묵상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그 전에 “묵상하다”라는 단어를 성경에서 검색해 봅시다. 개역개정판의 시편에서는 ‘묵상’이라는 단어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이전에는 ‘묵상’으로 번역했으나, 이제는 다른 단어로 대체했습니다. 몇 본문을 추려 보았습니다.
1) 내가 주의 법도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길들에 주의하며(119:15).
2)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119:97).
3) 내가 주의 증거들을 늘 읊조리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나으며(119:99).
4)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119:148).
‘묵상하다’라는 단어가 죄다 ‘작은 소리를 읊조리다’로 바뀌었습니다. 단 두 군데만 빼고요. 하나는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라는 시편 1:2입니다. 이 구절도 “그의 율법을 주야로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가 제격입니다. 또 하나는 “내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라는 19:14입니다. 이 구절도 “내 마음이 작은 소리로 읊조리는 것을 주님이 받아 주시기를 원합니다”로 해야 하는데, 우리에게 워낙 익숙하고 사랑받는 구절이라 그대로 둔 듯싶습니다.
묵상이라는 참 멋진 단어를 왜 없앤 걸까요? 이는 ‘묵상’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때문입니다. ‘하가’라는 단어인데, 문자적으로는 ‘중얼거리다’ 혹은 ‘속삭이다’라는 뜻입니다. ‘무언가를 깊이 숙고하다’는 뜻의 묵상과는 다소 거리가 먼 단어입니다. 그냥 ‘읽기’입니다. 사고하는 능력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읽는 동작 자체를 가리킵니다.
놀랍게도 저 단어는 의성어입니다. ‘하가’는 성경이나 책을 읽을 때 나는 소리를 문자로 표시한 것이지요. 요컨대, 성경이 말하는 묵상이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소리 내어 읽는 행동을 가리킵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성경을 그렇게 읽습니다. 그들이 통곡의 벽이나 성전에 손을 대고 몸을 앞뒤로 흔들며 기도하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겁니다. 의자에 앉거나 일어선 채로 성경을 읽는 것을 실제로든 영상으로든 본 적이 있을 겁니다. 한 손으로는 성경을 들고 온 몸을 앞뒤로 흔들며 입으로는 쉼 없이 중얼거립니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외국어를 배우는 것과 비슷합니다. 다른 나라 언어를 배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단어도, 발음도, 문법도, 사고방식도 낯설기 마련입니다. 외국어 습득 이론가들은 외국어 학습 방법으로 책 읽기를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성공적인 학습을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하는데, 바로 즐겁게 읽기와 소리 내어 읽기입니다.
인간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경을 자꾸자꾸 읽는 길밖에 없습니다.
묵상은 반복해서 읽기입니다.
‘읊조리다’, ‘읊다’는 말에는 소리를 낸다는 뜻과 함께 되풀이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다른 말로 ‘곱씹다’로 표현할 수 있겠네요. “성경을 읽되 본문의 의미와 뜻을 주의 깊게 생각하고 곱씹는다.” 묵상은 성경을 곱씹고 되씹는 일입니다.
저 단어는 되새김질과 관련 있습니다. 반추 동물이 풀을 뜯어 입에 넣은 다음 오래오래 씹는 것, 그것을 위로 넘겼다가 게워서 다시 씹는 것을 되새김질이라고 합니다. 그 과정을 몇번이고 반복하는데, 한두 시간은 기본이고 무려 여덟 시간 이상 걸릴 때도 있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묵상이란 소가 되새김질하듯 ‘곱씹다’라는 뜻이다”라는 말은 뭐 하나 더하거나 뺄 것이 없이 정확한 묵상의 정의입니다. 말씀을 되새김질하는 것, 말씀을 되풀이해 읽는 것, 본문 거듭 읽기가 바로 묵상입니다.
여호수아 1:8에서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며”라고 했을 때, 무겁고 두꺼운 성경을 입에 매달고 다니라는 말은 아니었겠지요. 여기서도 앞서 언급한 그 ‘하가’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즉, 입으로 소리 내어 읽되,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읽으며 반추하라는 뜻입니다.
반복 읽기의 유익은 꽤 많습니다. 우선 마음에 깊은 울림을 줍니다. 본문을 기억하기 쉬울 뿐 아니라, 본문에 대한 관찰, 해석, 적용이 자연스레 이루어집니다. 반복해 읽는 동안 깊이 생각하면서 다각도로 보게 됩니다. 실제로 소리 내어 반복해 읽었던 분의 말입니다. “반복해 읽는 과정을 통해 제 스스로 여러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는 훈련을 할 수 있었습니다.”
묵상은 천천히 읽기입니다.
성경의 진정한 저자인 하나님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들을 귀가 없으면 듣지 말라는 냉정한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제대로 읽어 달라는 애절한 요청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어느 구약학자는 이런 멋진 말을 남겼습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과 관계 맺는 비법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책장을 천천히 넘기는 일일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겠다고 성경을 펼치지만 헛수고일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요. 우리는 하나님이 빨리빨리 말씀하시기를, 내가 씨름하는 고민에 대한 대답이 자판기처럼 즉각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채근합니다. 얼른 말씀하시라고 닦달합니다. 내가 주인인 양 말입니다. 하지만 내가 성경의 한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는 내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이 결정해야 합니다.
본문을 그냥 한번 스윽 읽고, 해설을 한 번 훑어보고는 큐티를 했다고 착각합니다. 천, 천, 히, 아, 주, 천, 천, 히, 읽는 것, 그것이 큐티입니다.
그렇게 읽는 것은 단순하지만 성경 해석의 근본이기도 합니다. 주의 깊게, 천천히, 반복해서 읽는 것이야말로 성경 묵상의 제일 원칙입니다. 달리 더 보탤 말이 없습니다. 바로 그렇게 읽어야 합니다. 그게 묵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읽어야 할 책이 사랑하는 주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묵상은 듣기입니다.
소리 내어 읽는 것은 말씀을 듣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으려면 그 말씀이 내 귀에 들려야 합니다. 하지만 누군가 그 말씀을 읽어 주지 않는 이상 들릴 리 만무합니다. 예전에는 전문적으로 낭송하는 이들이나 교회 내 지도자가 읽어 주었다면, 지금은 우리가 스스로에게 읽어 주어야 합니다.
로마서 10:17을 읽어 봅시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여기서 말씀은 당연히 성경입니다. 성경을 듣지 않으면 믿음이 생기지도, 자라지도 않습니다. 들음은 말씀과 믿음 사이에서 매개체 역할을 합니다. 성경은 눈으로 읽는 책이 아니라 귀로 듣는 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듣기 위해 입으로 소리 내서 읽어야 합니다.
묵상이 뭐냐면 말이죠!
“묵상은 곧 읽기”라고 강조하는 까닭은 반복해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읽지 않고 오래 숙고만 하는 것은 묵상이 아닙니다. 읽고 또 읽고, 그렇게 읽은 것을 마음에 두고 되풀이하는 과정이 성찰이자 묵상입니다.
묵상이란 본시 수동적으로 수용하고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인간은 그 말씀을 듣습니다. 본문을 읽고 무언가를 끄집어 내는 것이 아니라 본문이 말하는 바를 가만히 듣는 것, 잘 듣기 위해 소리 내어 천천히 되풀이해 읽는 것. 그것이 바로 묵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