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부

요한계시록 강해 62. 바벨론을 위한 애가와 성도의 즐거움(계18:9-24)

(도입) 본문은, 큰 음녀인 큰 성 바벨론의 심판을 바라보는 땅의 왕들과 땅의 상인들, 그리고, 배로 무역하는 선장과 선원들과 선객과 바다에서 일하는 자들의 반응에 대한 이야기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심판이 참으로 철저하고 빈틈이 없어,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이들에게는, 몹시 두렵게 다가온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해준다.
1.이들은, 심판받은 바벨론의 모습을 보며 ‘화 있도다! 화 있도다!’라고 절규했다.
그 모습이 너무나 두려워 감히 가까이 하지 못하고 멀찍이 서서 공포에 떨어야 했다. 이에 대해, 한 힘센 천사가 ‘결코’라는 단어를 무려 여섯 번이나 반복하며 ‘결코 다시는 눈에 보이거나 비치지도 않고, 결코 다시는 귀에 들리지도 않는’참혹한 심판이라고 했다(:21-23) 다시는‘어떤 형태로든’ 즐거움이나 잔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소소한 즐거움이나, 미래에 대한 최소한의 희망과 기대조차 품을 수 없는 파멸이 임한다는 뜻이다(:22-23a) 하나님의 심판이 이토록 철저하고 두려운 것이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진정 두려워하며 경외해야 할 존재이시다. 그런데, 하나님은 마냥 두려운 대상만은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지극한 관심과 보살핌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마1:28-31) 본문은, 하나님의 엄위하심과 동시에, 하나님의 한없이 긍휼히 여기심을 떠올리게 하여,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균형’을 늘 기억하도록 일깨워주신다.
2.그런데, 이 광경을 바라보는 이들의 ‘애통과 두려움의 이유’가 참으로 특이하다.
안타까움이나 긍휼함과는 거리가 멀다. 큰 성 바벨론과 음행하거나 사치를 통해 누렸던 쾌락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고, 다시는 자신들의 상품을 살 자가 없기 때문에 슬퍼한다. 자신들이 취할 유익이 사라졌다는 사실만을 비통해하며 애곡할 뿐이다. 무너지는 큰 성 바벨론과 함께 죽어가는 생명에 대한 안타까움이나 긍휼함은 찾아볼 수 없다. 주님은 가장 큰 율법이 뭐냐고 묻는 율법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당연한 본분이고, 삶의 가치여야 한다. 위에 언급한 세 부류의 사람으로 대변되는, 세상의 가치관은, 주님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거스른다. 이들이 심판을 받아, 하나님의 철저하면서도 전방위적인 파멸에 들어가게 된 이유다.
3.본문은, 우리가 이웃을 어떻게 이해하며,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를 묻고 있다.
‘이웃’은, 빈번하게 접촉하는 지인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정치, 경제, 사회적인 환경들을 모두 포함한다. 세상은 더욱 더 그렇거니와, 우리 역시도 이웃에서 핑계를 찾는 경향이 있다. 삶에서의 불만이나 고난의 이유를 이웃에 전가하지 말고,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을 바르게 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본문의 장면은, 세 부류로 대별되는, 세상에 속한 자의 어처구니없는 모습이지만 그 행간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삶의 수준이, 어디까지여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선한 사마리아인을 생각해 보자. 그가 맞닥뜨린 환경은 자신이 의도한 환경도 아니고, 책임져야 할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는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강도만난 자를 보살폈다. 철저히 책임을 감당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삶의 자세도 이와 같아야 한다. 우리가 접하는 어떤 환경이나 상황도, 그것 자체로 복이거나 재앙인 경우는 없다. 무엇이 되었든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책임과 가치를 상실하게 하거나, 하나님에서 멀어지게 한다면, 그것은 재앙이다. 반면에, 아무리 큰 재앙으로 비칠지라도, 하나님께 더 가깝게 하는 계기가 되고, 하나님으로 채워지게 한다면 그것은 형통이다. 투옥된 상태에 있던 바울의 기쁨의 이유가 그랬다(빌1:12~21)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십자가를 지시겠다는 주님을, 베드로가 극구 말리자, 주님께서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하신 말씀과 동일한 맥락이다(마16:13-23)
4.요한계시록은, 세상의 심판에 대한 경고임과 동시에, 성도에게는 즐거움이다.
환경이 어떠하더라도, 부르심을 받은 본분과 책임을 따라, 이웃에 대한 실천적 신앙을 행하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주기 때문이다. 산상수훈에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다(마5:7) 심령이 가난한 자임을 자각하고, 그 무능과 무기력함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애통해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며, 자신에게 주어진 영적 책임을 감당해내는 자를,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신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그에게 심판을 행하였음이라‘(:20)고 하셨다. 인내하며 겪었던 아픔이나 억울함이 해소됨으로써 통쾌해하거나 후련하게 된다는 뜻만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본분과 책임을 늘 의식하며, 이웃에 대한 ’긍휼한 마음을 가짐으로써‘ 생명에 대한 책임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자에게는, 필연적으로 아픔과 고통과 희생이 뒤따르겠지만, 이 고난을 자초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기억해주시고 보상해 주신다는 말씀이다.
5.(맺는 말)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구현해야 할 책임을 받은 자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환경과 조건은, 하나님의 깊은 경륜 가운데서 나타나는 선하신 뜻임을 기억하라! 하나님은 늘 옳으시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자신이 행할 책임과 의무를 감당하는 자세로 나아간다면, 이 땅에서 우리에게는 불평이나, 염려나, 두려워할 일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본문의 말씀을 통해, 성도로서의 자부심과 복됨과 특권이 어디에 있는지 점검할 수 있는 분별력을 얻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영위함으로써 신앙적 실천과 승리를 누리는 삶이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