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입) 보좌에 좌정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상징하는 오른 손에, 일곱 인으로 봉한 두루마리가 있었다. 두루마리에 예언된 모든 일이 하나님의 주권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1.하나님의 오른 손에 있는 두루마리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일까?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과 여러 가지 재앙에 관한 내용이다. 이 심판과 재앙이,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를 확인하는 방편이 된다. 하나님의 구속과 종말에 대한 이 두루마리가, 완전수인 일곱 개의 인으로 봉해져 있다는 뜻은, ①하나님의 계획이, 완전하고도 충만하다는 의미와 ②신적인 비밀이므로,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라는 가르침을 내포하고 있다. 즉, 앞으로 발생할 종말의 사건은 우연히 발생할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권아래에 두고 계획하신 대로 행하시는 천부적인 것이므로, 어떤 피조물도 넘볼 수 없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창조주와 피조물을 구분하는 두루마리라는 의미가 된다.
2.그런데, 봉인을 해제할 자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사도요한은 슬피 울며 통곡했다.
이유가 뭘까? 사도요한은 두루마리에, 함께 믿음의 길을 걷고 있는 일곱 교회의 성도들에게 이미 말씀하신 약속을 따라, 힘과 용기를 북돋워주는 은혜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고 확신했던 듯하다. 그런데, 봉인을 뗄 수 없어,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확인 할 수 없다는 안타까움과 비통함에 잠겼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뜻을 밝히 알지 못함으로,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의 은혜를 나눌 기회를 가질 수 없다는 애절함과 안타까움 때문이다. 영적 지도자로서 성도에게 유익을 끼치려는 절실함을 보여준다.
3.우리도, 사도요한과 같은 이유로 아파하며 울어본 적이 있는지 돌아보자.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으므로, 지금 고통 중에 있는 지체를 위로해줄 수도 없고, 격려해줄 수도 없다며, 비탄에 잠겨본 적이 있는가? 하나님의 뜻이 이 땅 가운데서 실현되지 못하고 있음을 보고 통곡했던 기억이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여 여전히 세상과 함께 어울리면서 영원한 죽음으로 질주하는, 부모와 자녀, 배우자와 친척들과 지인들을 위해, 아픈 가슴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갈구한 적이 있는가? 성경은 우리의 신분에 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특별한 자들이며, 평범하지 않고, 왕처럼 존귀한 제사장이고, 거룩한 나라와 민족으로 인정받아,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벧전2:9a) 왜, 이런 혜택을 누리는가? 우리는 누구를 위한 제사장인가? 죄악의 어둠에서 불러내어 영광의 빛 가운데로 불러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해야 하는 신분이 되었으므로 (벧전2:9b) 믿지 않는 이들인, 세상을 위한 제사장임을 늘 기억하며,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전하여 그들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도록 인도하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 신분에만 도취하지 말고 일어서야 한다. 예레미야의 심정으로, 왕같은 제사장으로 부름받은 역할과 사명을 분명히 깨닫고 사도요한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대해 깨닫지 못하는 세상을 향해 아파하며 우는 자가 되어야 한다.
4.하나님께서는 ‘울지 말라’며 슬픔에 빠져있는 사도요한의 마음을 다독여주셨다.
이러한 위로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이 땅에서 진행되지 못하는 것 같아서 통곡하는 자와, 하나님의 뜻의 참된 의미를 깨닫지 못하여 절규하는 자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하나님은 배은망덕한 백성일지라도 재앙대신 평안으로 위로해주신다(사40:1, 렘29:11) 하나님의 뜻의 성취를 위해, 애통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간구할 때, 오늘의 형편과 사정만으로 절망하거나 판단하지 않는 믿음을 갖게 된다. 광야에 있을 때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견디며 감당해낼 수 있는 원동력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위로다. 이런 상황 중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뜻을 바라며, 그 뜻을 알기 위해 아파하며 갈구하여, 결국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면 위로가 된다.
5.사도요한을 향해서는 ‘유다의 사자(Lion) 다윗의 뿌리가 이겼다’고 위로하셨다.
유다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는 예수그리스도다(창49:9-10, 사11:1,10 마1:1)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분명히 알게 함으로써, 통곡의 원인인 무지와 불안과 근심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주는 진정한 위로자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주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위로를 받는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일이 우연이 아니다. 철저한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약속의 성취다. 구약시대의 백성들은 메시야에 대한 대망으로 그리스도의 초림을 기다렸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예수님의 초림을 감사하고 찬양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시선을 주님의 재림에 집중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약속대로 초림하셨으므로, 그 약속을 따라 반드시, 또 다시 오시기 때문이다. 초림하신 예수님은 ‘예수’라는 이름의 의미대로 우리 모두를 (稱義)구원해주셨다(마1:21) 하지만 이 구원을 우리의 삶을 통해 온전하고도 풍성하면서 충만하게 누리려면 주님께서 다시 오셔야만 가능하다. 그 때에야 비로소, 우리의 (榮化)구원이 온전하고도 완전하게 성취된다. 그러므로, 초림하신 주님의 성탄을 감사하고 기뻐하는 수준에만 머물지 말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간절히 기대해야 한다.
6.(맺는 말)
사도요한의 눈물은 영적 제사장의 눈물이다. 우리에게도 사도요한과 같은 통곡과 아픔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위로와 진정한 소망이 넘치게 됨을 기억하라!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감사함과 동시에, 초림에 대한 찬양에만 머물지 말고 재림하실 주님에 대한 기대와 소망으로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