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부

요한계시록 강해 50. 새 노래를 부르는 자들(계14:1-5)

(도입) 사탄이 하늘의 전쟁에서 패하여, 땅으로 축출되었지만, 도발을 멈추지 않았다. ‘집요하게’ 하나님의 구원을 방해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인내와 믿음으로’ 끝까지 달려가서. 결국은 이기신 어린양과 함께 승리의 산 시온에 서게 된다.
1.주님은, 이러한 구원과 승리를, 시각뿐만 아니라 청각을 통해서도 확증시켜 주신다.
하늘에서, 사도요한에게 승리를 확인하는 소리를 들려주셨는데, 그 소리는, 많은 물소리나 우렛소리와 같았다. 거문고(= 비파, harp)를 연주하는 소리와도 흡사했다.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사천이 부르는 ‘새 노래’의 선율과 어우러져, 장엄하고 웅장하며 조화롭고 광대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새 노래’는, 하나님의 창조사역과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찬양이다. 도래할 메시야로 인해 얻어진, 구원과 승리를 노래할 소망이 담겨있는데, 마침내, 그 염원이 실현되었음을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다. 참으로 장엄하고 웅장하면서도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찬양이다. 거기에 우리도 함께 한다. 십사만사천은 (우리를 포함하여) 구원받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을 망라하기 때문이다. 본문의 서두는, 어린양이 시온 산에 서 계신 모습을 ‘시각을 통해 보여주심으로써’ 구원의 영광스러움과 복됨을 언급한다. 본문의 서두이후에는, ‘청각을 이용하여’ 서두와 동일하게, 우리의 구원과 이김을 부연하여 설명해주심으로써 더욱 분명하게 확증시켜주신다.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모든 감각을 통해 분명히 확인하게 해주신다. 이를 통해 ‘새 노래’가, 구원받은 십사만사천만에게만 부여된 특권임을 알 수 있다.
2.그렇다면, 십사만사천의 삶과 신앙의 특성과 믿음의 내용은 뭘까?(:4-5)
첫째, 여자로 인해 더럽혀지지 않은 ‘순결함’이 있다(:4a) 여기에서 사용된 ‘더럽혀지지 않다’는 표현은, ‘오물에 의한 오염이 없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제사의식(祭祀儀式=祭儀)의 관점으로 해석해야 하는 말이다. 영적으로, 순결하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가 서약한 순결과 정절의 내용은 십계명, 즉, 율법이다. 율법의 핵심은, 진실하게 전심으로 마음을 다하면서, 가장 가치 있는 목숨을 기꺼이 희생하고자 하는 태도로, 의지적으로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 내는 것이다(마22:36-40) 이렇게 하는 것이 영적인 순결이다. 둘째, 어린양이 인도하는 곳은 어디든지 따라갔다(:4c) ‘항상 주님을 추종하는 제자’라는 뜻이다. 자기를 부인함으로써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자다(마6:24)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비웠다. 이것이 ‘자기 부인’이며, ‘자기 십자가’다(빌2:5-8) 셋째,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가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과 어린양께 속한다(:4b) 처음 익은 열매는 거룩히 구별된 존재다(렘2:3)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고백을, 삶으로 철저하게 살아내었다는 뜻이다. 넷째, 하나님에 대해 거짓으로 말하지 않았다. 어떠한 환경이나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고 분명히 신앙을 고백하는 삶으로 살았다. 다섯째,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제사의 제물처럼 제의(祭儀)적으로 흠이 없는 삶을 살았다. 자신의 삶이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지를 늘 점검하면서, 코람데오(Coram Deo)의 삶으로 믿음의 내용을 채웠다. ※ Coram(:앞에서) + Deus(:하나님) = Coram Deo : 늘 하나님을 의식하며 사는 삶
3.그런데, 왜, 우리에게 이 말씀을 주셨을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이 결코 알 수 없는 ‘새 노래’, 구원과 이김의 놀라운 노래를 말씀해주셨다. 이 ‘새 노래’로 이러한 믿음의 사람이 되리라는 소망을 가질 수 있게 하셨다. 이 노래를 부르는 자는, 신부로서의 순결함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는 사랑으로 지켜야 한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하는 충성된 제자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늘 첫 열매라는 성결한 자로 부름 받은 자신의 거룩함을 확인하는 삶을 살아내야 한다. 이와 더불어서 어떠한 환경이나 조건에서도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고, 항상 하나님의 주되심을 고백하며, 흠 없이 주님 앞에 서는 삶을 영위함으로, 믿음의 내용을 채워야 한다. 하지만, 정작, 우리의 삶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절망하게 되고 애통할 수밖에 없음을 확인하게 할 뿐이다. 그렇다면, 본문은 우리로 하여금, 좌절하게 만드시고자 주신 말씀일까? 결코 아니다! 우리의 믿음을 어떤 것으로 채울 것인지를 촉구하시는 동시에, 우리 존재의 연약함을 돌아보도록 하시기 위해 주신 말씀이다.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참으로 연약한 존재임을 확인하고 깨달아서, 하나님의 은혜 앞에 자신을 내려놓고 애통하는 자로 서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본문은 이 애통을 통해, 다시 확신을 주시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시다. 이것을 이루어내는 원동력은 ‘하나님의 열심’이다(고전15:57) 우리 자신의 힘과 지식과 경험이 아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신부로서의 순결을 지키게 해주시고, 이 땅에서, 제자의 삶을 살 수 있게 해주시며, 성결하고 구별된 자로 살게 해주신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고백하며 흠 없는 자로 살아갈 수 있게 해주신다. 이러한 주님 때문에, 우리는 본문의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다.
4.(맺는 말)
우리는 승리의 산 시온에 어린양과 함께 서서, 세상이 알지 못하는 웅장하고 거룩한 ‘새 노래’를 부를 자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길을 가야 한다. ‘하나님의 열심’이, 이 길을 갈수 있게 해주신다. 그 열심이, 애통하게 하심으로써,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더 크고 비밀한 은혜의 자리로 우리를 이끌어주신다. 우리 믿음의 깊이와 높이를 보다 더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하시는 은혜를 주신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서 다시 회복되게 하신다. 본문은 이 사실을 약속하신 말씀이다. 우리가 어떠한 삶으로 초대받았는지를 묵상하면서, 항상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