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부

안경 없이 성경 읽기(마이클 하이저 / 좋은 씨앗)

안경 없이 성경 읽기/ 마이클 하이저/ 좋은 씨앗

1. 진지한 성경 공부는 유약한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진지한 성경 공부에 대해 진실을 말하자면, 그것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라는 것이다. 본문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는 아마도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왜 그런 의미인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과 꾸준한 노력이 투입되어야 하며, 대개 한 본문에만 며칠, 몇 주, 또는 몇 달이 소요되기도 한다. 만일 자신에게 성경 공부의 효과가 없는 것같이 느껴진다면,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신에게 만족을 주는 그 어떤 것보다 성경을 더 잘 알길 진정 원하는가? 우리가 소위 하나님의 말씀이라 부르는 이 성경에 대해 정말로 깊은 통찰을 얻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몇 가지 유념해야 할 사항이 있다.
성경 공부는 영적으로 고취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세부적인 사안에 주목하고 명확하게 사고하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과 배치되지 않는다
성령의 인도하심은 커닝 페이퍼처럼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많은 이들이 성령이 우리를 진리로 이끄시리라는 약속의 의미를, 마치 성령이 우리의 나태함을 눈감아주시면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답변을 자동으로 제공해 주시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다. 성삼위 하나님이신 성령 하나님은 기말고사 시험 시간에 우리 옆에 앉아 자신의 답안지를 몰래 보여주는 학창 시절의 그런 친구가 아니다.
성경 공부를 위해 본인 스스로 노력해야 할 부분을 성령의 힘으로 대체하려 하지 말고, 진지한 성경 공부에 매진하는 가운데 성령에게 지혜와 안목을 구함으로 (당신 자신과 심지어 신학 서적을 저술한 모든 저자의) 이치에 맞지 않은 잘못된 생각들을 모두 드러낼 수 있게 하라. 하나님의 말씀 연구에 더욱 헌신하고 매진할수록 성령은 더욱 당신과 함께 일하실 것이다.
2. 진지하고 정직한 태도로 성경을 문맥적으로 해석하라
우리는 성경 본문을 해석할 때 여러 문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역사적 배경은 본문의 배경이 되는 특정 시기와 특정 사건을 보여준다.
문화적 배경은 당대 사람들의 생활방식, 그들의 세계관과 사고방식을 보여준다.
문학적 배경은 주어진 성경 본문이 당대의 동일한 문학 장르에 속하는 저작들과 어떤 방식으로 그 양식에 일치하는지(또는 그렇지 않은지)를 보여준다.
성경 해석을 위한 적실한 문맥은 성경 저자들의 문맥, 즉 성경을 기록하던 당시의 배경, 성경을 있게 했던 바로 그 정황이다.
오늘날 우리는 성경 저자들이 살던 시기에 번성했던 주요한 문명을 판독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그 시기의 문명이 낳은 지적이고 문화적인 산물들을 헤아려볼 수 있다. 그 자료들의 분량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엄청난 글과 문헌들이 있다. 우리는 전에 없던 방식으로 성경 저자들의 세계관이라는 맥락 – 학문적 표현으로는, 그들의 ‘인식 구조’ 또는 ‘인지적 틀’ - 을 발견할 수 있다.
한번 생각해 보라. 당신이 지금 어떤 글을 쓰고 있다면, 현재로부터 수천 녀이 지난 후대의 사람들이 어떻게 그 글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든 당신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당신 자신이 현재 바라보는 세계를 그들도 바라보지 않는 한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들은 당신이 생각하는 방식, 그 사고의 틀이 무엇인지 알아내야 한다. 당신을 잠재적으로 염려하게 하고, 분노하게 하고, 즐겁게 하고, 또는 우울하게 만드는 더 넓은 세계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그들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왜 이 단어를 사용했고 왜 저 단어는 사용하지 않았는지를 문법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또는 당신이 사용한 어떤 표현을 정확히 판독하기 위해, 그들은 당신이 살던 시대의 대중문화를 이해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이런 작업은 후대인들이 당신의 사고방식과 세계관, 그 틀이 무엇인지 알아내지 않는 이상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바로 이것이 본문을 그 문맥(맥락, 배경) 안에서 해석한다는 의미다.
3. 진정성 있는 성경 읽기와 초자연적 세계
초자연적 세계와 관련하여, 성경의 영감과 권위를 믿는다고 주장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물어봐야 할 질문은 단순하다. “성경인물들과 저자들이 믿었던 초자연적 세계를 나는 과연 어느 정도나 믿고 있는가?” 부정적으로 질문한다면 다음과 같다. “나는 현대인으로서 성경 인물들과 저자들이 믿었던 초자연적 세계를 과연 어느 정도 무시해야 그것을 받아들이는 데 불편해지지 않는가?” 이 질문들에 정직하게 대답해 보라. 초자연적 세계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성경의 권위에 우리가 어느 정도로 진지한지 알게 될 것이다.
4. 성경을 성경 되게 하라
성경 이해의 길은 우리가 성경을 우리의 전통, 우리의 선입견, 우리의 개인적 선호, 또는 우리 문화 속에서 일어나는 지적 논쟁에 짜 맞추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삶의 어려움이나 개인적인 의문점을 해결해줄 어떤 자료와 근거를 성경에서 찾으려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이 궁극적으로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긴 하지만 본래 우리를 대상 독자로 해서 기록된 문헌이 아니라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성경의 기록은 우리에게 여전히 너무나도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성경이 본래 말하려던 대로 말하게 할 때만, 비로소 그 메시지 또한 정확하게 분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유념해야 한다.
성경 저자들의 당시 관점에 따르면, 지구는 평평하고 둥글며 지지하는 기초가 있고(삼하 22:8) 물로 에워싸여 있었다(창 1:10). 물은 땅을 뒤덮은 견고한 궁창으로 둘러져 있었다(창 1:6; 잠 8:27-28). ᄒᆞ님이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기록하라고 택하신 성경 저자들은 과학을 기술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전혀 그렇게 할 수 없었고, 하나님도 그 사실을 잘 알고 계셨다. 우리는 창세기를 다윈의 진화론에 맞서 논쟁하는 방향으로만 몰아가거나 이 안에 양자물리학의 원리가 감춰져 있는 것처럼 다루기보다는 창세기를 있는 그대로 두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이 영감을 불어넣어 기록하신 창세기의 목적,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진리,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지닌 책무에 관한 진리를 선포하는 목적이 성취될 수 있을 것이다.
5. 고집스런 문자주의 해석: 뿌린 대로 거둔다
하나님이 성경의 기록을 위해 택하신 고대의 저자들은 굳이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될 필요가 없었다. (천체의 운행 방식을 이해하는 현대의 과학자일 필요가 없었다.) 하나님도 그들에게 그런 것을 요구하시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은 가장 중요한 진리를 전하기 위해 자신의 영으로 그들을 감화시키셨을 뿐이다. 그 진리란, 하나님이 우리가 아는 (우리를 포함한)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책임감 있는 존재이며, 이곳 지상에서 그리고 그 너머에서도, 우리의 생명은 오직 하나님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의 저자들은 현대의 과학 교육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계관과 인식의 틀 그리고 고대 세계에서 잘 알려진 상징적 은유(그들의 문화적 문맥)를 통해 진정한 창조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왜 그것이 중요한지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것이 성경을 있는 그대로 취하는 것이며, 오늘 우리의 문맥이 아니라 성경 자체의 문맥에 비춰서 본문을 해석해야 한다는 사고인 것이다. 그러나 너무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저들의 절대적이고 타협불가능한 문자주의를 마치 성경의 영감성과 무오성에 대한 순전한 믿음인 마냥, 마치 문자주의를 믿음과 동의어인 것처럼 인식하는 세뇌교육을 당해왔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전체 기독교 신앙의 역사에서 그런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문자적 해석”에도 해석이 필요하다. 문자의 의미는 결코 명확하지 않다. “물”이라는 단어를 한번 생각해 보자. 이 단어의 “문자적” 의미는 무엇인가? 이것은 명사인가 아니면 동사인가? 어느 경우든, 이 단어의 ‘명백하게 이해되는 의미’는 무엇인가? 몇가지 예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명사로서, “물”은 다음과 같은 의미일 수 있다. ‘화합물, 액체 음료, 자연계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물(대양, 바다, 호수, 못, 늪, 강, 시내, 샛강, 만, 소해협). 또한 하나의 동사로서, “물을 주다”는 다음과 같은 의미일 수 있다. ’관수하다, 수분을 공급하다, 침을 내다, 울다‘
그렇다면 앞의 여러 항목 중에서 어떤 것이 ’물‘에 대한 명백한 ’문자적‘ 의미인가? 어떤 것이 가장 이해하기 ’쉽고‘(또는 명백하고) 간결한 의미인가? 이것이 요지다. 예로 든 것 모두 다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고 이해하기 쉬운 의미들이다. 하나의 단어가 갖는 다양한 의미들을 구분하는 것은 문맥과 은유다. 이제 물에 대한 은유적 의미로까지 들어가면 보다 더 흥미로워진다. 그리고 때로는 어떤 문맥에서 요구되는 의미가 바로 은유적 의미일 가능성도 있다. “물”은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의미에서 생명의 근원, 정화, 변화, 움직임, 또는 위험을 뜻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이런 은유들은 물이 갖는 물리적 특성 때문에 이해될 수 있으며, 여전히 어떤 실재를 묘사한다. 비문자적이라고 해서 “가짜”라는 의미가 아니다. 문자주의를 고집한다고 해서 반드시 정확한 성경 해석 또는 심지어 통일성 있는 성경 해석을 담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6. 성경의 모든 것이 전부 예수님에 관한 것은 아니다
첫째, 예수님과 관련이 없는 어떤 본문을 예수님의 특정한 행위와 말씀에 비추어 우리가 판단한다면 그 본문이 실제로 무엇에 관한 본문인지에 대해 깨달을 수 있는 일말의 희망도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성경에 그 어느 것도 우연히 기록된 것은 없다. 성경은 지적 활동에 의한 창조물이다. 성경에 대한 고차원의 관점을 지닌 우리의 임무는, 하나님이 성경 안에 해당 본문을 넣기 원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분별하는 것이다.
둘째, 모든 본문을 예수님과 억지로 연결시켜 해석하려는 시도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볼 수 없는 본문들의 중요성을 최소화시키거나 무시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서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복음 이야기 자체에 더 구체적인 설명을 추가하지 않는 본문들은 그저 주변적이고 선택적인 본문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영생을 얻는 것과 “전혀 무관한” 본문에 사람들이 무슨 이유로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시간을 투자하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편에서 볼 때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성경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하나님의 의도적인 선택과 결정에 따라 기록된 결과물임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의 선택은 두 가지다. 우리는 우리의 이런 믿음이 사실이며 그에 따라 합당하게 반응할 수 있고(즉 하나님의 모든 경륜을 공부할 수 있고), 아니면, 성경 기록과 관련한 하나님의 모든 결정이 임의적이고 지적인 것이 아니라는 판단에 따라 반응할 수도 있을 것이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본문에서 무조건 능숙하게 예수님을 발견해 내는 기술은 진지하게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열의를 오히려 저하시킬 수 있다. 또한 특정인에게만마치 어떤 영적인 권위나 특별한 (심지어 권위적인) 안목이 있는 것으로 믿게 만들 수도 있다. 주어진 어떤 본문에 소위 “예수님에 관한 내용”이 명백히 드러나지 않았더라도 우리가 배운 방식대로 어쨌든 이 모든 것이 예수님에 대한 내용이라고 계속 되뇌이게 되면, 그 누구도 진지한 성경 공부의 필요성을 실감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목회자들이나 다른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그들만의 특별한 혜안으로 “발견해 내는” 것들만 수동적으로 들으려 할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성경 본문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되면, 자신들 스스로 말씀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하는 능력을 내버리게 된다.
결국 요지는 우리가 성경의 영감과 권위에 대해 온종일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본문 해석을 위한 쓸데없어 보이는 번거로운 수고들로부터 벗어나려는 잘못된 통념으로 인해 문맥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의 위대한 드라마, 그 대서사는 궁극적으로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성경 모든 본문에서 언제나 핵심 주제가 되시는 것은 아니다.그런 개념은 해석학적 기술과 판단에 따른 것이지, 각 본문 자체가 실제로 말하는 내용은 아니기 때문이다.
7. 성경 읽기와 성경 암송은 성경 공부가 아니다
먼저 가장 확실한 것부터 말하자면, 우리는 반드시 성경을 읽어야 한다. 또한 성경 암송에도 힘을 기울여야 한다. 이 두 가지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에 주축이 되는 반드시 필요한 영적 훈련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둘 모두 그 자체로 성경 공부는 아니다.
독서라는 것은 약식으로 이뤄지는 가벼운 행위로 일종의 여가선용을 위한 취미활동이다. 그 동기는 개인적인 즐거움과 풍요로운 삶을 위한 것이지 어떤 내용을 완전히 터득하고 숙달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인류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야기와 하나님이 주시는 인생의 교훈을 얻기 위해 성경을 읽는다. 이런 성경 이야기는 우리의 삶을 붙잡아주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시켜준다. 성경 읽기는 본질적으로 경건의 행위이고 어떤 중요한 기술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반면에 성경 공부는 더 많은 집중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종의 전문적인 행위다. 우리는 공부라는 것이 어떤 방법이나 기술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 그것은 특정한 종류의 도구 또는 도움일 수도 있다. 성경을 공부할 때면 우리는 질문하고, 문맥에 대해 생각하고, 비판적 사고를 형성하고, 해석을 위한 더 많은 정보를 찾는다.
성경 읽기와 공부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실제로 누구든지 커피 한 잔을 스스로 타서 마실 수는 있다. 그 정도는 대부분 사람들이 가능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바리스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런 일에 수반되는 행위들이 기본적으로는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일반인들의 커피 제조 수준을 뛰어넘는 바리스타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어야 하고, 전문적인 연구와 기술을 활용하는 경험이 필요하다. 그것은 성경 공부에도 똑같이 적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