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부

요한계시록 강해 56. 큰 음녀가 받을 심판(계16:17-17:6)

1.일곱째 천사가 그 대접을 ‘공중’에 쏟았다.
‘공중’에는 ‘공기 중’이라는 뜻이 있다. 대접 재앙을, 도무지 피할 방도가 없고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음을 암시한다. 또한, ‘공중’은 사탄의 통치 영역이므로(엡2:2) 사탄을 겨냥한 심판임을 나타낸다. 그때, 성전의 보좌로부터 큰 음성이 나온다. 이 재앙이 하나님의 주권아래에서 행해진다는 증거다. 그 음성은 ‘되었다’ 라고 말한다. 일곱 번째 대접의 재앙으로, 모든 재앙이 최종적이고 완벽하게 종결됨을 의미한다. 이어서, 하나님의 임재와 현현을 상징하는 번개와 음성들과 우렛소리와 함께 큰 지진이 있었다. 이 지진도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인데, ‘큰’ 이라는 형용사를 반복함으로써, 유사 이래로 견줄 데 없이 엄청나서, 피할 수도, 버텨낼 수도 없는 재앙임을 나타낸다.
2.지진의 결과, 큰 성 바벨론이 세 갈래로 갈라진다.
바벨론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모든 세력과 국가들의 상징이다.  이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모든 것들이 물리적인 파괴와 함께, 그들의 세력과 권세와 능력도 깡그리 와해된다는 뜻이다. 그 이유가‘큰 성 바벨론(의 죄악)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가 되었기 때문’이다(16:19c) 하나님께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내리자, 섬이 없어지고 산악도 무너진다. 이뿐만 아니라, 무게가 한 달란트(=40kg)되는 우박이 하늘에서 내린다. 이로 인해, 사람들이 하나님을 비방하지만, 이전과 달리, 회개에 대한 언급이 없다. 최종적인 이 재앙에는 더 이상 회개의 기회가 없음을 시사한다. 그래서, 대다수의 학자는,‘마쳤다’(15:1)와 같은 의미인, 본문의‘되었다’(16:17 “It is done!”)를, ‘다 이루었다(요19:30)’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마침’으로 해석한다. 일곱째 재앙으로, 구원의 기회가 완전히 닫히기 때문이다.
3.이러한 경고를 반복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두렵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다.
하나님의 경이로우심과 우리를 향해 베푸신 은혜를 상기하게 하셔서, 우리가 그 은혜 안에 머물게 하시기 위함이시다. 이와 더불어, 재앙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을 비방하는 자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우리에게 있는지 돌아보는 계기로 삼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모든 은혜가 박탈되는 마지막 재앙의 순간까지, 회개하지 않아서, 지옥의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될 영혼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품도록 하시기 위함이시다.
4.이윽고,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중 하나가 큰 음녀가 받을 심판에 대해 말한다.
큰 음녀는, 땅의 임금들과 음행하고, 땅의 사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게 하는 자로서,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의 연합체인 물위에 군림하고 있다(17:15) (영적인) 음행은 우상숭배다. 본문에서는 육신의 쾌락을 추구하는 음란도 포함한다. 이 음녀가 타고 있는 붉은 빛의 짐승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성도를 핍박하는, 붉은 용이나, 그 하수인인 두 짐승과 별로 다르지 않다. 그녀의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은, 당시의 명품으로, 그녀의 권세가 막강함을 드러낸다. 금과 보석과 진주로 치장하고 손에는 금잔을 들고 있다. 물질적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소유한 최상류층의 모습이다. 이마에는, ‘비밀(mystery : 신비, 수수께끼, 불가사의)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리의 대표를 상징하는) 큰 바벨론, 땅의 음녀들(:매춘부)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성매매를 위해 매춘부를 고용한 고용주)’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큰 음녀는 , ‘힘과 권력, 경제력과 성적 음란함’ 으로 현혹하여 세상이 심판을 당하게 한다.
5.성령께서는, 이 음녀가 받는 심판을 보여주시려고 사도요한을 광야로 이끄셨다.
광야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 수 있는 땅이다. 세상의 관점으로는, 생존이 불가능한 곳이다. 사도요한을 광야로 인도하신 이유는, 사도요한의 눈앞에 펼쳐지는 환상을 직시하고 바르게 해석하도록 하시기 위함이시다.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살아야, 바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과 단절할 때,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해지고, 하나님의 역사를 더욱 뚜렷이 분별하여 확인할 수 있는 상태가 된다. 우리가 일상의 삶속에서 세상 사람들과 부대끼다보면, 우리의 정체성과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잠시 망각하여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기도 한다. 그 때 우리는, 스스로를 영적인 광야로 내몰아, 이 세상을 멀리서 관조할 시간과 장소를 확보해야 한다. 믿음의 열심과 행위들이, 타성에 젖어 관성에 의한 종교행위로 전락한다고 느낄 때,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자신을 점검해봐야 한다. 우리는 전혀 원치 않았는데, 주님께서 광야로 내 몰 때도 있다. 바로 그때, 본문의 이 말씀을 기억하길 바란다. 현재, 이 상황의 영적 의미가 무엇이고, 하나님께서 이를 통해, 무엇을 하시길 원하시며, 어떻게 이루시길 원하시지는 지를 보게 하시기 위함이시다. 하나님의 역사를 더 뚜렷이 인식하며,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해지도록 광야로 이끄셨으므로, 고난과 역경의 광야는 은혜가 된다.
6.(맺는 말)
십자가에서 죄값으로 지불하셨던 그리스도의 은혜가, 더 이상 은혜가 되지 못하고 종말적 재앙으로 마무리 될 때가 온다. 일곱째 대접의 재앙에서, 더 이상 회개를 언급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주목하고 명심하라! 회개할 기회가 더 이상 주어지지 않는 때가 반드시 이르게 된다. 어떻게 믿음을 이어가야하며, ‘부름 받고, 보냄을 받은’ 이 사명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 지를 하나님 앞에서 묻고 확인하길 바란다. 성령께서 사도요한을 광야로 데려가셨듯이, 때로는, 우리도 스스로를 세상과 단절시켜야 한다. 심지어, 전혀 원치 않았지만 홀로 광야에 서도록 하실 때도 있다. 유익하게 하시기 위함임을 기억하라! 우리의 삶을 통해,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영적인 눈으로 정확히 보고, 들으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영위하도록 하시기 위함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