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부

요한계시록 강해 30. 유혹과 정화의 시간 (1) (계6:1-8)

(도입) 죽임 당했던 어린양이 일곱 인(봉)을 떼는 시점으로부터, 인(봉)과 나팔과 대접의, 세 가지 종류의 심판이 (시간의 순서와는 무관하게) 이루어진다.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외부의 도전을 극복해야할 네(4) 교회와, 내부의 문제를 해소해야할 세(3) 교회로 나눴듯이, ‘인(봉)과 나팔과 대접’의, 세 가지 심판에 속한, 일곱 번씩의 재앙도, 4와 3의 동일한 구조로 나눌 수 있다. 각각의 일곱 재앙 중, 앞의 네(4) 재앙은 공통점이 있는 사안이고, 나중의 세(3) 재앙은, 전후나, 상호간에, 연관성을 유추하기 힘든 항목으로 나열되어 있다. 세 가지 심판에 의한, 여섯째와 일곱째 재앙의 막간에는, 택하신 백성을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돌보심이 어떠한지를 일깨워주고 있다. 인(봉)과 나팔과 대접의 심판이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무섭고 끔찍한 재앙이므로, 성도를 안심시켜주기 위함이다. 드디어, 첫 번째 인(봉)이 열리자,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오라’고 외쳤다. 그 음성을 따라, 흰말을 탄 자가 활을 갖고 등장했다. 면류관을 받고 이기고 또 이기려고 했다(:2) 흰 말을 탄 자는 과연 누구일까?
1.흰색은 성결과 거룩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기도 한다(1:4, 6:11, 7:9)
면류관을 받아쓰고 활을 가진 자는, 이기고 또 이기려고 했는데, 이긴 자는 ‘다윗의 뿌리’라고 했다(5:5) 얼핏,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묘사와도 흡사하다(19:11-16) 하지만, 이는 성급한 예단이다. 인(봉)을 떼는 주체인 어린양이, 그 결과로 나타나는 재앙을 실행하는 인물이 된다는 설명이 부자연스럽기 때문이다. 흰말을 탄 자가 그리스도가 아닌 이유는 몇 가지 더 있다. 백마를 탄 그리스도는, ‘충신과 진실’이라는, (정체성을 검증할 수 있는) ‘이름’과,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는 분명한 표식이 있었다(19:11, 16) 흰말을 탄 자는, 정체를 확인할 이름이 없었다. 그리스도의 무기는 말씀의 검이지만(19:15) 흰말을 탄 자는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자의 무기인 활을 가졌다(:2) 머리에 쓴 관의 의미도 다르다. 그리스도께서 쓰신 관은, 왕이 쓰는 왕관에만 유일하게 한정하는 단어로 표현했다. 이에 반해, 흰말을 탄 자가 쓴 관은, 왕위에 등극한 자가 쓰던 관을 표현하기도 하지만, ‘전쟁이나 경기에서 승리하여 받는 관’이나, ‘선지자와, 신탁을 받은 영매(靈媒)’의 관이라는 뜻으로 더 빈번하게 사용했다.
2.학자들은 ‘흰말’이, 말에 탄 자가 거짓 선지자임을 암시하기 위한 단어라고 한다.
이 때문에, 사도요한이 의도하여 선택한 단어라고 추정한다. ‘이기고 또 이기려 한다’는 서술은, 활을 겨누어 성도를 죽이고, 군사력으로 정복하여 승리를 쟁취하려는 강한 욕구의 표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뜻하지 않는다. 성도를 억압하고 핍박하여 굴복시키는 상황에 대한 묘사다. 지금까지 열거한 모든 사실을 종합해보면 흰 말을 탄 자는, 거짓 선지자와 적그리스도라는 사실이 자명하다. 종말의 징조인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의 출현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과도 일치한다(마24:5, 11)
3.이를 통해, 우리가 배우게 되는 교훈은 무엇인가?
흰말을 탄 자의,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와 정말 많이 흡사하여 혼동하기 쉽다는 사실이다. 활이 상징하는 놀라운 능력과, 면류관이 의미하는 거대한 세력과 권세를 가진다. 이기고 또 이길 수도 있는데, 이 때문에 현혹될 수 있다고, 본문을 통해 경고하고 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의 징계 때문에 야기된다. 재앙의 징조며, 종말의 시작이다. 그렇다면, 적그리스도는 언제 나타날까?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직후부터 적그리스도가 발호했다. 사도요한도 당시에 거짓 선지자와 적그리스도의 영이 세상에 있다고 경고했다(요일4:1-3) 이는, 종말이 예수그리스도의 초림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사도요한처럼, 우리도 종말의 시대를 살고 있다. 종말론적 신앙은, 심판의 날이 가까이 왔을 때를 대처하기 위한 신앙이 아니다. 매일 매일을 심판의 그날로 여기며 살아가는 자의 신앙의 태도를 지칭한다. 주님의 부활과 승천 직후부터 적그리스도가 활개를 쳤다는 사실은, 그들이 모든 시대와 상황을 막론했음을 알려준다. 세력과 풍조, 이념과 시대정신을 대표하는 모습으로 존재했다. 배후는 사탄이다. 종말론적인 삶을 영위하려면, 본질적으로 이 세상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끝날 수밖에 없는 처지라고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우리가 죽은 후에 되는 제물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 있을 때에)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이 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께 드릴 진정한 영적 예배다(롬12:1) 구체적으로는, 자신이 하나님인 듯이 행동하는 어리석음과 배금주의를 추구하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한다. 이를 위한 유일한 수단으로. 말씀의 거울 앞에서 자신을 점검하며 성령의 씻음을 통해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한다(요14:26) 이렇게 하여, 변화를 받으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 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종말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
4.(맺는 말)
일곱 번씩 이루어지는 세 종류의 심판은,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로 나타나는 재앙이다. 흰말을 탄 자의 등장은 이러한 재앙의 징조다. 적그리스도의 출현을 가리킨다. 이 징조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이후로 부터 줄기차게 나타났다. 종말은 이미 시작되었다. 우리는 종말 안에 살고 있다. 어떤 자세로 종말을 살아내야 하나? 우리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살아있는 제물의 삶을 살면 된다. 즉, 세상을 본받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 날마다 말씀을 통해, 자신을 새롭게 함으로써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깨달아서 그 뜻을 이루어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런 삶을 살아내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 존귀하심과 영광스러움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다. 또한, 이를 통해 얻는 은혜의 부요함과 풍성함과 평안을, 누리고 맛보며 세상으로 흘러가게 하는 은혜를 누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