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부

요한계시록 강해 25.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계4:4-11)

(도입) 찬란하고 영광스런 하나님의 보좌 주위에는 네 생물이 있었다. 하늘의 보좌를 둘러 이십사 보좌에는, 흰옷을 입고 금관을 쓴 이십사 장로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꿇어 엎드려 네 생물과 더불어 밤낮 쉬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했다.
1.하나님의 보좌를 둘러 앉아있는 이십사 장로는 비범하지 않은 탁월한 존재다. 이십사 장로는, 구약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 모두를 대표하는 구약의 열두 족장과, 신약의 모든 성도를 상징하는 열두 사도를 의미한다고 해석하곤 했었다. 또한, 어떤 이들은, 하늘의 열려진 문으로 올라오라는 부름이, 사도요한과 함께 교회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이라고 생각하여 이 땅의 모든 교회를 나타낸다고 추정한다. 개혁주의 신학과 궤를 달리하는 세대주의자들은, 미리 하늘로 들림(携擧) 받은 성도들의 대표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생각들은 성경에서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사도요한은 이십사 장로를, 네 생물과 더불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섬기면서,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향은 성도들의 기도인데(5:8) 이것을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린 존재가 천사라고도 명시하고 있다(8:3) 사도요한이 이십사 장로중의 한 명을 부를 때에, ‘주’라고 높여 부른 사실에도 주목해보면(7:14) 인간과는 격이 다른 존재임을 암시한다. 이와 더불어서, 이십사 장로가 드리는 찬양은, 그들이 (범죄한 적이 없어서) 애초부터 구원의 필요가 없었음을 보여주고 있다(5:9-10) 이뿐만이 아니라, 구원 받은 모든 성도를 상징하는 십사만 사천과는 구별된 존재라고 기술하고 있다(14:3) 정리하자면, 이십사 장로는. 하나님의 보좌 인근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신원해달라는 성도의 기도를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일을 수행하는 존재다. 구약시대에 이런 일을 담당했던 이들은 레위인과 제사장이다. 이십사 보좌는, 노년의 다윗이 성전건축 준비의 일환으로 레위인과 제사장을 이십사 반열로 나눈 일에서 유래한 듯하다(대상24:18b) 즉, 이십사 장로는 천사일 가능성이 높다.
2.네 생물은 어떤 존재로 이해해야 할까? ‘생물’이라는 단어는 ‘짐승’과는 전혀 다른 의미다. 짐승도 사람도 아니지만 생명이 있어서 ‘살아있는 피조물’을 지칭한다. 사자와 송아지 같고, 얼굴이 사람과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 네 생물은, 천사가 하듯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을 했다. 하나님의 보좌의 지근거리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천사이기 때문이다. 사자는 고귀함과 용기와 권위를 나타낸다. 송아지는 힘과 강함을, 사람의 얼굴은 지혜를 표현한다. 독수리는 용맹과 신속함을 상징한다. 네 생물이,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능력과 강함으로, 지혜롭고 신속하게 수행하는 천사라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 이십사 장로도 하나님을 보좌하는 천사라고 추측할 수 있는데, 흰옷을 입고 금관을 쓴 것으로 봐서는, 지위가 네 생물보다 우위에 있는 듯하다.
3.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은 쉼 없이 하나님만을 찬양하고 있다. 엄청난 권위와 지위를 가진 존재이지만, 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자신의 능력과 권위의 상징인 금관을 기꺼이 하나님께 드리면서 기쁨과 감격으로 경배했다. 하나님은, 그 어떤 존재도 이를 수 없는, 초월적 경지의 영광과 존귀,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지극히 합당한 분이심을 알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신격화하던 당시의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는 자기 이름 앞에 ‘주 하나님’을 덧붙여 숭배하도록 강요했다. 이에 반해, 사도요한은,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가 하늘 보좌에 좌정하신 하나님을 향해 ‘우리 주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찬양한다는 사실을 적시했다. 도미티아누스는 삶의 주관자도 아니고 진정한 통치자도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움으로써, 신앙 때문에 핍박받는 성도들로 하여금, 믿음을 공고히 해주기 위함이다.
4.본문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보여준다. 인생의 궁극에는 반드시 그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분이시다. 감사하고 감격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무시당하고, 억울함과 모멸, 배신과 비통함으로 점철된 다윗의 삶은 결코 순탄하지 못했다. 파란만장했지만 그의 말년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이 었다 (시23:1-6) 믿음은, 오늘만 보고 결론을 내리지 않기로 결단하는 것이다. 비록, 당장은 눈물과 근심에 직면해 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개개인을 향한 계획과 공의를 온전하게 하셔서, 결국에는 하나님을 찬송을 하게 하심을 믿고 전진하는 것이다. 세상의 군왕들은 자신들의 위세와 힘으로 굴복시켜 영광과 높임을 받으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우심과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에서 믿음의 이유를 찾는 자는,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 우리가 회의와 시험에 빠지는 이유는, 자신의 생각과 판단과 조급함에 매몰된 탓이다. 믿음의 사람은 이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생각과 판단을 따른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크심과 온전하심에 자신의 삶을 맡겨라. 그리하면 이 땅에서도,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처럼, 영광중에 감사와 감격의 찬송을 드리게 된다.
5.(맺는 말)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에 대한 무지에서 출발한다. 하나님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예배에 임해야 한다.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기억하는 자에게, 하늘 보좌에서의 영광스러운 기쁨과 감격의 찬양을 누리게 하신다. 비단, 나중만이 아니다. 현재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지만, 이미, 우리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를 지금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음을 기억하라. 우리는 하늘에 속한자다. 두려움과 근심과 염려의 포로가 되지 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자신을 맡기고 견디고 견뎌내라! 이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하심과 계획하심이 있다. 연단을 통해 우리를 더욱 온전케 하셔서 하나님의 부요하심,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케 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찬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