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부

요한계시록 강해 41. 배에서는 쓰나 입에서는 달리라 (계10:1-11)

(도입) 지난번에, 인(봉)과 나팔과 대접의 재앙도, 4와 3의 구조로 되어 있고, 각 재앙마다 막간이 있다고 언급했었다. 본문은, 여섯째 나팔에 의한 재앙이후의 막간에, 이 재앙에서 살아남은 자들을 향한, 우리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시는 말씀이다.
1.그 내용을, 힘 센 천사를 통해 전해주신다. 힘센 천사는, 화려하고 장엄하며 놀라운, 영광중에 등장하지만 예수님은 아니다. (창조주이신 성자 하나님을, 피조물인) 천사로 표현하는 것이 격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계시록의 묘사와도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5:2-3, 10:1-2, 18:21) 힘센 천사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은 엄청난 권위와 영향력을 추정하게 하는 표현일 뿐이라 생각한다. 그의 손에는 펼쳐진 ‘작은’ 두루마리가 있었다. 어린양에 의해 봉인이 해제된, 바로 그 두루마리다(5:1-7) 그런데, 굳이 ‘작은’ 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표현한 이유는 뭘까? 어린양에 의해 열려졌던 두루마리에는,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내용이 적혀있다. 본문의, 힘 센 천사는, 그 중에서도 예수님의 사역에 근거하여 함께 동역할, ‘성도들의 사역에 한정된 내용’만을 전하려했기 때문인 듯하다.
2.천사가 큰 소리로 외치자,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일곱 우레가 말씀을 전달했다. 그 내용을 사도요한이 기록하려 하니,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는 하늘에서의 소리가 들렸다. 이단의 주장처럼, 은밀하게 감추거나, 특정인에게만 계시할 비밀이기 때문일까? 아니다. 여섯째 나팔과 일곱째 나팔의 막간인. 지금 당장 전달하기에는 시기상, 약간 이른 말씀이라고 해석해야 무리가 없다. 계시록은, 종말에 관한 하나님의 계시의 ‘모든 봉인을 열어’, ‘남김없이’ 보여주시기 때문이다(22:10, 10:6b-7) 제지당한 사도요한에게, 힘 센 천사는,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으로 맹세하며, ‘지체하지 않겠다’,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했다. 종말을 대하는 우리의 믿음을 점검하는, 시금석으로 삼아야 할 말씀이기도 하다. 일곱 우레로 묘사한 하나님의 임재가운데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모두가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화답하길 기도한다. 믿음으로 민감하게 반응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충만하길 바란다.
3.사도요한은, ‘두루마리를 가지라’는 하늘의 명령을 따라, 천사에게 요청했다. 힘 센 천사는, 그 두루마리를 ‘먹어버려라’라고 했다. ‘먹어버려라’라는 단어에는, ①단순히, 먹는다는 개념을 넘어서 ‘몹시 굶주린 자가 음식을 받는 모습’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두루마리를 ‘귀하게 여기며, 감사와 기쁨으로 받으라’는 말씀이다. 이와 더불어서, ②‘완전히 소화하다’라는 의미도 있다. 즉, 소중히 여기며, 기쁨과 감사함으로 받아, ‘몸에 배게 함으로써, 완전히 자기의 삶이 되게 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배에는 쓰다고 했다. 삶이 되도록 소화하는 과정의 난관과 고통을 암시한다. 입에는 꿀같이 달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배에는 쓰고, 입에는 꿀 같이 단 것이 무엇일까? 이 말씀을 삶으로 살아낼 때의 상황을 말한다(겔2:3-10, 3:1-3) 가시와 찔레와 함께 있으며 전갈 가운데 거주하는 듯한 아픔을 겪어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이 땅 가운데에서 이루어내는, 영광스런 선지자의 자리이기 때문에, 꿀처럼 달다고 하셨다.
4.그런데, 이 말씀을 여섯째 나팔의 재앙이후에 주셨다는 사실에 주목하길 바란다. 여섯째 나팔의 재앙으로 인류의 삼분의 일이 죽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두려운 상황에서도 여전히 회개하지 않는 삼분의 이의 사람들은 죽이지 않으셨다. 이들을 말살하지 않으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거나, 의지적으로 거부하면서 회개치 않는 세상을 위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자다. 이 일은, 종말을 사는 우리의 ‘의무와 책임이며 사명’이다. 단지, 하나님의 인을 받은 십사만사천명 안에 들게 된, 복된 자라는 사실만으로 만족하는, (신앙적 이기주의자의) 수준에 머물지 않기를 바란다. 믿음의 여정은 ‘배가 쓰리고 아프나, 입은 꿀처럼 달콤한’ ‘이중적 갈등’ 안에서 진행된다는 사실을 항상 명심하라! 십자가의 길과 같은 맥락이다(마16:24) 십자가에는 고통과 아픔만 있지는 않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 가운데에서 이루어지게 하는, 영광스런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임도 잊지 말자!
5.그러면, 우리는 ‘고난과 역경, 아픔과 눈물의 길’을 어떻게 걸어갈 수 있나? 우리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는 반드시 실패한다. 이 길을 걸어가게 하는 원동력은 주님의 사랑에 있다. 주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기억하며 삶속에서 끊임없이 그 사랑을 묵상하면 된다(요일4:19) 그 사랑의 정수인 십자가를, 날마다 마음에 새기길 바란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감격을 회복하여, 주님을 위해 아픔과 고통을 자초하는 삶을 살아내고자 하면, 우리는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와 도우심을 경험할 수 있다. 이 세상을 이기게 되어 꿀처럼 단맛을 느끼는 삶을 살게 된다.
6.(맺는 말) 종말은, 우리에게 공포나 짐이 아니고 복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세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종말을, 모든 것이 멸망하는 파괴와 공포로만 이해한다. 이뿐만 아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목도하고도 무지와 의지적 거부로,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고, 돌이키려 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세상을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은, 세상을 위해 ‘우리가 나서야 한다’고 일깨워주신다. 일반백성뿐 아니라, 임금처럼 높은 지위에 있는 자에게도 가야 한다고 권면하신다. 그 길은 가시와 찔레와 전갈이 득실대는 길이다. 이 고통이, 삶으로 드러날 때, 단맛을 누리는 삶으로 변화된다.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이를 누릴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주님 사랑의 핵심인 십자가를 매순간 묵상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