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부

요한계시록 강해 66.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계19:11-16)

(도입) 지난주에 간략히 나누었던,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묘사는, 주님의 재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함축해서 보여주셨다. 오늘은, 백마를 타신 그리스도와 심판에 대한 묘사를 통해서, 주님의 재림에 담긴 함의를 좀 더 세밀하게 확인해 보기를 원한다.
1. 재림하시는 그리스도는 백마를 타셨다.
그 눈은 불꽃같다. 통찰하는 능력으로, 교회의 형편과 사정을 남김없이 모두 꿰뚫어 보신다는 뜻이다(계1:20) 악한 자에게는 심판의 주로, 의인에게는 구원과 생명의 주로 오신다. 심판의 때에,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 숨김없이 드러난다. 거짓된 자는 명백하게 벌하시고, 의로운 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면류관을 받아 누리게 하신다(마25:31-46) 이 구절은 성도 개개인뿐 아니라, 교회를 향한 소망의 말씀이기도 하다. 쇠퇴하여 한국교회가 조만간 사라질 것이라고들 하지만,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불꽃같은 눈으로, 주님의 교회를 영원히 지키신다는 언약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머리에는 ‘많은 관’을 쓰고 계신다. 붉은 용이라고 하는 사탄이나, 그 하수인인 짐승이 쓴 관은 감히 견줄 수 없다. 권세와 권력, 경제력과 문화적인 영향력은, 한시적이며 참된 통치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비교할 수 없이 ‘많은 관을 썼다’는 표현으로, 그리스도만이 참 왕이시고 진정한 주권자로 다시 오신다는 사실을 함축했다. 권세와 물질과 향락이 우리를 유혹하지만, 그 결국은 부질없고, 영원에 비하면 순간에 불과한 허상이었음을 확인하게 해주신다. 이 뿐만이 아니다.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는 이름’을 가지셨다. ‘비밀스럽다’라기보다는 ‘예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화(桑田碧海, 刮目相對)’했기 때문에, 누구인지 알아보기 힘들다는 의미다. 초림의 예수님은 메마른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이나 풍채도 없고,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도 없었다. 게다가 멸시와 치욕의 십자가를 져야했던 볼품없는 모습이었다(사53:2-5) 그런데, 다시 오실 때의 모습은, 예전과 너무나 다르다.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오신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두려운 것이 아니다. 복되며, 사모해야 하는 것임을 다시 일깨워 주신다. 그리스도께서 입은 옷에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하는 피가 뿌려져 있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인한 ‘구원의 완성’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심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를 웅변해주신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믿음으로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신분의 변화에 이르렀지만, 그 신분에 합당한 은혜의 부요함과 풍성함은 ‘아직’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면, 바로 그때부터 온전한 누림이 허락된다. 이러하신 그리스도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수님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라는 뜻이다(요1:1-3)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은 그리스도 자신의 판단과 계획이 아니다. 창조 때부터 우리에게 허락하신 십자가의 구원을 완성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함이시다.
2. 이어서 백마를 탄 그리스도께서 심판하시는 모습이 전개된다.
먼저는, 입에서 나오는 예리한 검으로 만국을 치신다. 이 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리스도의 승리는 말씀에 의한 승리다. 그 힘이 말씀에서 나오는데, 말씀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세상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공격형 무기도 오직 진리의
말씀밖에 없다. 믿음의 걸음이 진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이긴다. 계속해서 말씀에 묶여있어야 하는 이유다, 예수님도 자신의 힘으로 이기지 않았다. 말씀으로 이기셨다. 그 다음에는,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신다. 하나님의 심판의 철저함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재림하신 그리스도는 진리의 힘인, 말씀으로 승리하실 뿐만 아니라, 대적들을 철저하게 파괴하시고 철저하게 무너뜨리시는 심판주로 오신다. 마지막으로는,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로써 포도주 틀을 밟으신다. 이 땅에 만연한 거짓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세력을 진멸하신다는 뜻이다.
3. 본문을 통해 살펴본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정리하면 어떤 의미일까?
전반부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모습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이 ‘완전하고 절대적이며 필연적이다’는 사실을 서술하고 있다. 이와 대비하여, 후반부는 하나님의 대적에 대한 철저한 심판의 모습을 삼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의 심판 또한 ‘완전하며 철저하고 절대적이며 필연적이다’는 사실을 말씀한다.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시기 때문이다. 결과가 상반된, 본문의 두 장면은, 우리가 얼마나 복된 자인지를 다시 확인하게 해준다. 우리의 시작부터 그 종말까지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렸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시선을 그리스도의 재림의 자리로 끌고 가신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길을 걸어가다가 실족하지 않기 위해, ‘우리를 온전케 하신 이인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촉구한다. 온전케 하시는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그 모습은 십자가에서의 장면이 아니다. 영광스런 재림이다. 그걸 볼 때, 우리는 이 믿음의 걸음을 끝까지 견뎌낼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피 흘리기까지 포기하지 않고 싸워야 한다(히12:4)
4. (맺는 말)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약속임과 동시에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해준다.
그 궁극적인 싸움의 자리에서, 우리는 ‘죽도록 충성’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순교다. (정황상, 우리가 직면할 가능성이 희박한) 적색 순교만이 순교가 아니다. 백색 순교도 있음을 기억하라! 백색순교는 그리스도 때문에, 세상에 대하여 죽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끝까지 놓지 말고 잡아야 할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이와 동시에, 우리의 마음에서 버려야 할 것과, 끊어내야 할 것을 계속해서 끊어내야 한다. 이것이 피 흘리기까지 싸우는 것이고 (백색)순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