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부

요한계시록 강해 24. 하늘 보좌 (계4:1-3)

(도입) 일곱교회가 ‘이미 이긴 자’이므로, 결국은 승리하여 그 영광을 누리게 된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끝나자, 사도요한에게 하늘에 열려 있는 문이 보였다.
1.하늘은 실존하는 장소다. 관념상으로 존재하는, 추상적 개념의 가상공간이 아니다.
하늘은, 다다를 수 없이 높고 존귀하며, 그 어떤 것도 범접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자리다. 사도요한이 90대의 노인으로, 핍박을 받아 밧모섬에 유배되어, 힘겨운 노동에 시달리던 암담한 상황이었다. 이처럼, 믿음의 사람들이 환란과 고통 중에 있어서, 이 땅의 모든 것이 사방으로 막힌 듯해도, 우리를 위해 하늘이 열린다는 사실을 기억하길 바란다. 사도요한으로 하여금 올라오라고 하신 그곳, 향후에 우리가 함께 거할 그 하늘나라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하나님의 보좌다. 보좌는 통치자의 자리다.
2.하늘 문을 통해,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보좌를 보여주신 이유는 무엇일까? 고난을 당하는 성도에게, ‘진정한 왕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제시하기 위함이다. 그 곳에 참된 통치자가 계심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당시의 현실에서, 신적인 존재로 군림한 로마의 황제가. 숭배의 대상이기도 하고 통치권을 행사하는 주체이기도 했지만, 진정한 통치자가 아니라는 의미를 웅변하고 있다.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만이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유일하신 통치자이심을 나타낸다.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만물을 통치하고 주장하며, 계획하여 성취하시는, 참된 통치자요 진정한 왕이시다. 황제숭배와 같은 우상화는 인간이 하나님의 통치를 도용한 결과다. 당시에, 직면한 현실에서, 로마의 황제의 영향력이 가장 크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흔들리지 않기를 다독이며,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보좌를 보여주셨다. 말세에, 종말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갖고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누가 참 왕이며, 하나님이신가?’하는 문제는 초미의 관심사다. 당시와 달리, 오늘날엔, 우리를 강제하는 거대한 세력과 권세는 없다. 단지, 믿음의 걸음을 방해하는, 가정과 직장에서의 억압과 걸림돌이 있다. 그 구성원의 지위와 요구가, 보이지 않는 왕과 통치자 행세를 하기 때문이다. 믿음의 여정에서 두려움의 원인이 될 수는 있으나, 하나님께서 참된 통치자이심을 분명히 한다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믿음의 걸음의 궁극인 종말이, 영광스러움과 아름다움과 복됨의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3.그런데, 오늘날은 당시와 달리, 신앙의 자유가 있다. 우리는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 말세의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스스로를 신(神)이라고 여기는 경향을 보인다(딤후3:1-4) 이런 자들은, 경건조차도 자신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려한다(딤전6:5)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여, 하나님을 자신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켜버린다. 하나님을 참된 통치자로 인정하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성도는 이런 삶과 거리를 두게 된다. 하나님의 보좌를 보여주신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만을 유일하신 통치자로 인정하며, 그의 다스림에 기쁨으로 순종하라고 촉구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다가올 종말이, 영광스럽고 충만한 복이 될 수 없다. 거역하고 대적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될 뿐이다.
4.여기서 잠시, 성도들이, 특히, 젊은 층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를 생각해보자. 첫째는, 극히 일부의,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인정하지 않는, 교회 지도자의, 개인적인, 권위주의에 대한 실망과 혐오 때문이다. 우리가 아직도 유교의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으므로, 늘 조심하며 경계해야 한다. 성경이, 권위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권위에 토대한 말씀 앞에 순종하라고 명령하시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말씀에 근거한 영적인 권위로) 헌신을 요구받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부담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정당한 영적인 요구에 대한 잘못된 수용의 사례라고 할만하다. 교회가 요구하는 헌신은 하나님과 그 나라를 이루기 위한 공동체를 위함이다. (헌신할) 시간과 재능과 물질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았다.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려할 때, 전혀 부담이 없어야 한다. 부담을 느끼는 경우는, 이 모두가 자신으로부터 연유한, 자신의 소유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자기중심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스스로 신(神)의 자리를 차지한 세대의 특징이다. 참 하나님이 누구시며, 소유의 기원이 어디인지를, 듣는 자가 부담스러워할 것을 두려워하여, 교회가 제대로, 명확히, 가르치지 못한 탓이다. 하나님의 보좌를 가장 먼저 보여주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바르게 알지 못하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보좌와 은혜를 경험할 수 없고, 기쁨으로 누리며 살아갈 수도 없다. 종말을 논할 때, 가장 우선으로, 삶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이를 회피하는 자는, 스스로가 신(神)이 되어 살다가, 종말의 그날에서야 주님을 맞으려고 하므로, 그 날짜에만 집착하게 된다.
5.(맺는 말) 하늘 보좌의 환상은,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는지를 점검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하나님의 통치에 불순종하면, 종말에 기대할 아무런 소망이 없다.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인정하지 않는 자에게 종말은, 하나님의 진노만 있는 재앙이다.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는 자에게는, 영광의 회복이다. 하나님의 복된 은혜의 잔치에 참여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대신 주인으로 삼았던 세상의 것에서 떠나,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 때론, 피흘림과 고난과 역경이 뒤따르겠지만, 결국엔 영생을 취하게 됨을 기억하라(딤전6:11-19) 이를 위하여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종말을 기대하고 소망하는 자의 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