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부

요한계시록 강해 21. 내가 사랑하기에(계3:19-22) 

(도입) 라오디게아는 참으로 부요한 지역이었다. 그곳의 교회와 성도들도 경제적인 혜택을 함께 누리고 있었다. 물질적 풍요함을 믿음에 대한 보증이며, 영적보상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그 내면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어도 만족할 수 있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주님의 진단은 확연히 달랐다. 믿음이 변질되었기에 역겨워 토해낼 도리밖에 없는 존재라고 하셨다. (교회가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으로부터 외면 받지 않으려면,  ‘주님께’로 돌이키라고 하셨다. 유일한 회복의 길은 (물질이 아니라) 오직 주님께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믿음에 대한 나름대로의 자부심이 강했던 라오디게아교회가 이러한 평가에 대해, 대경실색하며 수긍하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신 듯하다. 왜냐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1.‘내가’사랑한다고 하시며, ‘나(=ego)’를 강조하여 말씀하셨기 때문이다(:19a)

사랑하시기에, ‘책망하여 징계한다(:19c)’고 하셨다. ‘책망한다’는 말씀은‘(허물을) 드러낸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징계한다’는 단어는 (허물이나 잘못을 뉘우치도록 나무라며) 훈련시킨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정말 사랑하시기에, 부끄러움을 드러내시고  지적하신 연약함을 온전케 하시려고, 징계를 통해 훈련의 과정으로 인도하시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즉,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고 속히 벗어나 참된 은혜의 자리, 이미 허락받았던 영광의 자리로 회복하라는 의미다. 믿음의 길에서 완전히 이탈한 라오디게아교회는, 자신들의 공로와 믿음에 대한 ‘반대급부’로 물질적인 편리를 누린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불렀던 이유도, 예수님의 힘과 능력을, 세상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기 위함에 불과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믿음의 본질에서 완전히 떠나있어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열심과 행위는 여전히 왕성했었다.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주님은, 칭찬할만한 근거가 전혀 없었던 라오디게아 교회조차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기다려주시며 사랑하셨다.

2.이처럼, 사랑으로 행하시는 ‘책망과 징계’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할까?

열심을 내고 회개해야 한다(:19:b) ‘열심을 내라’는 ①‘단회성에 그치지 말고 꾸준히 지속하여 열심을 내라’는 의미와 ②‘삶의 존재이유인 사명을 발견하고 그것을 향해 열심히 헌신하는 열정을 갖추라는 뜻을 갖고 있다. 또한 ③모든 것에 우선하여 예수그리스도께 집중하라는 권면도 아우르고 있다. 열정이 식으면 믿음이 오염되기 시작한다. 그래서 열심을 내라고 하셨다. 열심은 인간의 의지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반드시 회개를 동반해야 한다. 회개는 말씀의 조명하심을 받아 말씀이 지시하시는 곳으로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이와 함께 ’시급함‘도 회개의 관건이다.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의 연약함과 죄를 깨닫게 하시면, 지체 말고, 즉각 회개하라!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허락받은 사명을 떠올리며, 흔들림 없이 헌신하는 열정을 회복해야 한다.

3.이를 위해, 주님께서 마음의 문 밖에 서서 문이 열리도록 두드리신다고 하셨다(:20)

(이 구절은,  ‘유효한 부르심’에 의해,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변화되는 ‘칭의(稱義)’단계의 구원을 돕기 위해 초청하는 말씀으로 잘못 적용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경우가 C.C.C.의 사영리다. 이 말씀은, 이미 구원받은 자에게만 적용해야 하는 말씀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은 불변’이나, 연약함으로 인해 믿음이 변질되어 ‘하나님과의 교제가 소원하거나 단절된 자’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이다) 문맥상, 라오디게아교회를 향한 책망과 징계에 대한 궁극적 이유를 설명해주시는 말씀이다. ①주님께서 문 밖에 계시는 이유는, 세상에서의 부요함을 자신의 공로에 의한 영적인 보상으로 착각하여, 주님과 신앙을, 물질적 부요를 지키기 위한 도구로 전락시킨 자들이, 주님을 마음의 문밖으로 밀쳐내어 교제가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②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떠나지 않으시고 마음의 문 앞에 서서 ‘문을 열 때까지 계속해서’ 두드리신다. ③그리고,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면, 들어오시겠다고 하신다. (다시 강조하지만, ‘유효한 부르심’에 의해, 마음의 문이 열려 주님을 영접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다. 알미니안 주의자들의 주장과 달리, 마음의 문은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로 열리므로, 문이 열리는 것에 대한 우리의 수고나 공로는 전혀 없다. 하지만, 취소되지 않는 신분의 변화 후, 교제를 회복하기 위한 목적으로 행하는, 마음의 문을 여는 노력이나 반응은 우리에게 맡겨진 몫이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에 철옹성이 있다할지라도 부수고 들어 올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우하시며 ‘사랑하시기에’, 열심을 다해, 설득하고, 참고 참으시며, 우리가 스스로 마음의 문을 열어 교제의 관계가 회복하기를 기다리신다. ④드디어, 마음의 빗장을 풀고 우리가 우리의 의지로 문을 열면, 주님께서는 잘 차려진 정찬을 친히 준비하셔서 함께 먹고 마시면서 깊은 은혜의 교제를 나누시겠다고 하신다. 이것이, 칭찬할 것이 없는 라오디게아교회와, 부족하여 늘 넘어지는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의 마음이다.

4.(맺는 말)

자녀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자녀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으로만 온전하다고 할 수는 없다. 우리의 온전하신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때로는, 책망하여 아프고 연약한 부분을 드러내어 직면하게 하심으로 깨닫게 하시고, 징계를 통해, 회복하도록 훈련시키신다. 그러므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책망과 징계를 듣는다면, 그 말씀 앞에서 즉시, 회개해야 한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찾아오신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기다리신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설득하신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친히 준비하신 정찬에 초대하신다. 우리 모두 이 만찬의 주인공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