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입) 요한계시록을 개괄(槪括)해보면, 1장은 승리하시는 예수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되는 하나님나라의 최종 모습과, 이를 통해 성도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움을 기쁨과 감격으로 하나님께 찬양함을 서술하고 있다. 1장의 분위기와 달리, 2장과 3장은 (지상에 존재했었던 모든 교회와 앞으로 세워질 모든 교회를 상징하는) 일곱 교회에 대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다룬다. 그런데, 4장은 1장에 이어 예수그리스도께서 보좌에 앉으셔서 영광을 받으시는 승리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기를 계속하고 있다. 즉, 1장에서 2장과 3장을 제외하고 4장으로 건너간다 해도 문맥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①그래서, 오늘은 2장과 3장을 1장과 4장 사이에 첨가하듯이 배치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함께 상고했으면 한다. 또한, 일곱 교회에 보낸 서신이, 구조상 동일한 형태로 교회의 사자(=사역자)가 수신자이지만, 이후에 이어지는 발신자인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묘사와 칭찬과 책망과 권면의 내용뿐만 아니라, 성령이 교회에 주시는 말씀인,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복이 교회마다 다른 이유에 대해서도 함께 살펴봤으면 한다. ②이와 더불어서 일곱 교회를 거명하는 순서에 대해서도 간단히 나눠보자.
1-1.계시록 1장과 4장 사이에, 첨가하듯이 2장과 3장을 배치한 이유는 무엇일까?
1장 이후 4장을 거쳐 19장까지의, 상세하고도 다양한 환상에 대한 서술이 방대하여 자칫하면 중심 맥락인 승리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주제가 흐려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일곱 교회들이 직면한 문제들에 대해, 예수그리스도께서 어떤 과정을 거쳐서 최종 승리에 이르게 하시는지를 미리, 분명하게 보여주시기 위함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자면, 이 땅에 있었고, 앞으로 존재할 모든 교회의 성도 개개인이, 일곱 교회와 유사한 상황과 환경에 처할 때에 분명한 정답지를 제공받음으로 당면한 문제들을 능히 해결 받을 수 있게 해주시는 배려다.
그래서, 19장까지 연관된 핵심내용을 두괄식으로 미리 추려서 2장과 3장에 서술함으로써, 이후의 내용들에 의해 방향을 잃지 않도록 하는 이정표가 되게 했다. 즉, 2장과 3장이, 1장과 4장으로부터 19장까지의 내용과 별개의 독립된 말씀이 아니라 긴밀하게 연관된다는 뜻이다.
1-2.그렇다면, 발신자인 예수그리스도를 일곱 교회마다 다르게 묘사한 이유는 뭘까?
예수그리스도를 일곱 교회들의 상황과 연계하여 각각 나눠서 다르게 묘사함으로써, 예수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역사하시는 구체적인 역할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예수그리스도를 다르게 묘사한 것에 대해 에베소 교회의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말씀의 토대위에 든든히 잘 세워진 교회였지만, 하나님을 향한 처음 사랑을, 버렸기에 돌이키지 않으면 촛대를 옮겨 버리시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발신자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책망하기 이전에 자신을 ‘오른손에 있는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로 묘사한 점에 주목해보자. 주님의 구체적인 역할이 (촛대를 옮겨 버리는 것이라기보다는) 일곱별이 상징하는 교회의 사역자들을 붙들어주고 이 세상의 모든 교회를 상징하는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면서 교회를 살피시고 보호하시는 역할을 감당하신다는 사실에 방점을 두고 있다. 교회들이 직면하게 되는 모든 문제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해결 받게 된다는 뜻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돌이켜 회개한 성도들이 근본적인 두려움과 염려에서 벗어나도록 해주신다. 처음 사랑을 잃었다는 지적과 책망은, 벌주시려는 의도가 아니다. 경각심을 일깨워서 격려하고 위로하여 회복시키시기 위함이시다. 그러므로, 위축되지 말라!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신다. 주저앉을지라도 일으켜주시며 승리하게 하신다. 우리 모두가,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복을 받기를 원하신다.
2.그런데, 일곱 교회를 거론하는 순서에는 과연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굳이 특별한 의미는 없다. 성경에서 언급하지 않는 사실에 대해 과도하게 신학적인 의미를 부여하거나 인위적으로 지나치게 하는 해석은 성경을 왜곡할 뿐이다. 대표적인 잘못이, (기독교)이단들과, 신약교회를 일곱 세대로 나눠 설명하려한 세대주의자들의 해석이다. 일곱 교회에 대한 배열은 시편의 형식처럼 문학적인 교차대구의 형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또한, 에베소교회가 (당시의 일곱 교회들에 대한 관할권을 가지고 있던) 사도요한의 활동의 중심지였고, 밧모섬에서 발송한 편지의 도착지이면서, 일곱 교회를 차례로 연결하는 도로의 출발점이기도 했으므로, 자연스레 지리적인 이유에 의한 순서로 나열했다고 이해하면 된다.
3.(맺는 말)
오늘부터 함께 묵상을 시작하는 2장과 3장의 내용이, 1장과 4장 사이에 배치된 이유는, 예수님께서 교회에 역사하셔서 교회가 직면한 문제를 어떤 과정을 거쳐서 최종적인 승리로 이끄시는지를 미리 분명하게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연관된 상황에 처한 성도들에게 분명한 정답지를 제공해주신다. 그러므로 2장과 3장에 서술된 일곱 교회의 이야기는, 서론인 1장과 본론에 속하는 4장 사이에 (예전에 자주 접했던 설교처럼) 단순하게 삽입된 별개의 내용이 아님을 분명히 인지해야 한다.
일곱 교회를 거론하는 순서에 대한 (기독교)이단들과 세대주의자들의 해석은 명백한 잘못이다.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하거나 억지로 인위적인 해석을 하려하면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다. 시편에서 자주 나타나는 교차대구의 문학적인 형식으로 이해하거나 지리적인 이유 때문으로 이해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