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입) 농경사회가 아닌, 오늘날에도 추수감사주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감사의 제목과 이유는 믿음의 여정에서 찾아야 한다. 믿음 안에 있는 우리의 삶이, 씨를 뿌려서 열매를 맺게 하고 익혀서 추수하도록 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1.주님은, 지금, 가난한 자, 굶주리는 자, 슬퍼서 우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다.
이런 자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허락되었다고 하셨다. 주님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배격과 외면을 당하고, 멸시와 비난을 받으면 상이 크기 때문에 복되다는 말씀이다. 반면에, 부요한 자(:24)는 화(=슬픔, 탄식)를 당하게 된다고 하셨다. 스스로, 충분히 부요하다고 생각함으로써, 이미 위로받고 보상받았으므로 그날엔 받을 것이 없다고 하셨다. 보편적인 상식과는 많이 동떨어진 듯 들린다. 가난하고 굶주리며 슬퍼하는데 왜, 복이 될까? 제자의 길이 이렇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따로 구별하여 열두 제자를 세우시고, 산상수훈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설파하셨다. 산을 내려온 후, 억눌린 자를 해방시키시며, 주린 자를 먹이시고 질병을 치유하시는, 주님의 놀라운 이적을 접하면서, 그들은 주님의 후광으로, 높임과 인정을 받고, 명성도 얻어서 흠모의 대상이 되리라고 들떠있었을 듯하다. 하지만, 참된 제자의 길은 그 반대다. 주님 때문에, 뺏기고 굶주리며, 억울함과 따돌림을 당하고, 비난과 핍박을 받는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주님께서는 이 땅에 속한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고작, 썩어질 세상의 것을 주시려 오신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2.그렇다면, 가난과 굶주림과, 애통과 배척당함이 복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라하셨다. 자신을 미워하는 자라도 선대하며,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모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다. 이 뺨을 치면, 저 뺨도 돌려대고, 겉옷을 탐내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며, 구하는 자에게 요청대로 주고 되돌려달라고 하지 말며, 남에게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하셨다(:27-31) 이 말씀은,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하나님 나라의 의를 온전히 이루는 삶을 살아내야 한다는 뜻으로 하셨다. 주님의 이러한 요구에 부응할 자신이 있는가? 주님의 제자임을 부인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세워보라! 제자의 삶을 살기위한, 영적인 역량이나 자산이 스스로에게 얼마나 있는지 돌아보라! 아쉽게도, 도무지, 전혀 없음을 처절하게 느끼게 될 것이다. 완전한 빈털터리와 같이, 핍절한 알거지요 가난뱅이일 뿐이다. 하나님의 의를 이룰만한 것을 티끌만큼도 가지지 못한, 영적 파산자임을 깨닫는 자만이, 울부짖고 애통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바라보게 된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영적인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애통이 있어야만 복된 삶이 된다. 이런 삶을 살면, 세상은, 배척하고 비난하며, 핍박하고 따돌린다. 하지만, 세상으로부터 받는 고난은 주님의 제자라는 증거가 된다. 그래서 복이다.
3.본문의 부요한 자(:24)의 의미도 물질적 소유가 많은 자를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의에 도달함에 있어서, 조금의 부족함도 느끼지 않고, 누구의 도움도 바라지 않아,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하려는 마음조차 없는 자를 가리킨다. 스스로의 의로써 구원에 이를 수 있고, 누군가를 구원에 이르게 할 만큼의 의가 충분하다고 자부하는 모든 자가 이에 해당한다. 반면에, 자신의 가난함을 깨달은 자는, 자신의 의로는 결단코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알고, 이 사실에 절망한다. 그래서, 애통해하면서 하나님께 나아와,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구하게 된다.
4.가난과 굶주림은 결말이 아니라,‘과정’이다. (종말의 그날에 추수의 기쁨이 있다)
믿음의 여정은, 슬픔과 고통의 눈물로 뿌린 씨를 자라게 하여, 맺힌 열매가 익어가게 하는 과정임을 기억하라! 제자의 길도 마찬가지다, 이 길의 종착지는 하나님의 나라다. 영적인 가난함 자체는 복이 아니다. 가난함에 대한 깨달음이 복이다. 영적 가난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다. 주님께서는,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그 비참함과 빈곤 때문에 통곡하면서 주님 앞에 나아와 꿇어 엎드려는 자를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자기를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을 맡길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그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된다. 그래서, (아직 종말에 이르지 않은) 지금도, 온전하지는 않지만, 추수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이 땅에서도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어느 정도는 맛볼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현실은 비록 녹록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수의 기쁨을 누릴 수 있으니,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홀로, 광야에 내팽개쳐진 듯하며, 영육 모두 암담한 현실에 직면한 탓에, 감사할 것이 없다고 말하는 자가 있는가? 추수할 것이 없다고 예단하여 낙망하거나 불평하지 말라! 추수감사절의 약속은 출애굽 후, 광야생활의 초입에서 받았지만, 당장이 아니라, 광야생활을 청산하고 정착한 가나안에서 비로소 누리게 되었음을 기억하라!
5.(맺는 말)
추수감사절은 약속의 절기다. 단기적으로는 한 해를 감사하고, 한 해의 주신 은혜를 하나님 앞에 올려드리는 시간이다. 긴 안목으로 바라보면, 약속을 확인하는 절기, 약속을 바라보고 소망하며, 기뻐하는 절기다. 믿음의 여정을 이탈하지 않고 굳건히 걷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광야의 삶, 굶주림과 슬픔에 직면해 있다면, 믿음의 여정이, 눈물로 씨를 뿌려서, 열매를 숙성하게 하고, 각종 풍파와 서리로 인해, 더욱 견실하여 맛나고 풍성한 추수를 준비하는 과정임을 기억하라! 하나님의 열심이, 이 모든 것을 이루신다. 광야의 삶은 최종 결과를 확인하게 해준다. 비록 가끔 혼란스러울 수는 있겠지만, 두렵지도 않고 불안하지도 않게 된다. 그래서 포기하지 않는다. 당장, 자신의 손안에 있는 것만으로 기뻐하지 말고 약속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감사하는 자가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