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입) 버가모는, 소아시아의 ①행정수도로 정치와 권력의 중심지였다. 자진하여 로마에 복속된 도시일만큼, 로마황제에 대한 숭배의 열기가 대단히 열렬했다. 사실상, 사탄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통치하는 도시였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②‘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이라고 하셨다. 문화적 기반이 잘 갖춰진 ③지성의 도시로도 자긍심이 높았고 당시의 일상생활에 필요불가결했던 ④상인조합은 중세의 ‘길드’의 모태가 되었다고 할만큼 활성화되고 상호 긴밀하게 결속되어 있었다. 그들은 모일 때마다 우상숭배와 더불어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여사제와 행음하는 축제형식의 제사를 지냈다. 영적으로도, 육적으로도 몹시 음란한 도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가모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사실은, ①어디서나 교회가 필요하며 ②죄악이 만연한 곳일수록 교회의 존재와 역할이 더욱 요구됨을 뜻한다.
1-1.주님께서는 버가모교회의, 환경에 구애받지 않는 ‘신실함’에 대해 칭찬하셨다.
버가모교회의 충성된 증인, 안디바는 신실하게 믿음을 지키다가 순교했다, ‘충성’은 구체적으로는, 믿음을 지켜내기에 너무나 열악한 환경이지만 자신의 역할을 잃지 않고 신실하게 믿음의 자리를 지키면서 (주님께서 떠나라고 하실 때까지) 떠나지 않고 견디며 ‘살아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제사음식이 아니면 제대로 된 먹거리를 구할 수 없고, 상인조합과의 교제를 단절함으로써 지역사회에서 따돌림 당하는 힘겨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곳을 지키며 살았다. 그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순교할 수 있었다.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인데도 ‘믿음을 지키며 신실하게 살았기 때문’에 ‘충성되다’고 칭찬받았다. 믿음의 용장 갈렙도, 별 쓸모가 없는, 산지를 배분받았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에, 복된 삶의 터전이라며 흠모했다(수14:12a, 시16:6)
1-2.지금, 많이 힘든가? 현재의 위치는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자리임을 기억하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은 자신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신실하게 살아내며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자다. 특별하고 대단한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고백은, 하나님 때문에 목숨을 비롯한 모든 것을 잃어도 감수하겠다는 결단이기도 하다. 그래서, 순교가 바탕이 될 수밖에 없다. 바울은 (부활에 대한 소망을 전제하며)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라고 토로했다. 늘 순교해야만 하는 상황과 환경으로 자신을 몰아넣으며 회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상의 삶을 이러한 태도로 (준비하며) 살아야만 순교의 상황에 닥칠 때, 순교할 수 있다. 순종은 ‘자신을 내려놓은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자신을 비워 낮아지신 것에 그치지 않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주님처럼(빌2:5-8) 상황이 어떠할지라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끝까지 가는 것을 말한다. 버가모를 떠나지 않고 그곳을 지키고 살아내며 하나님께 영광이 된 성도들의 삶이 이러한 순종이었다.
2-1.버가모 교회 구성원 중 일부를 향해서는 ‘지극히 엄하게’ 책망하셨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모압에 이르렀을 때, 모압여인과 육신의 음행으로 시작하여 영적인 음행에도 이르게 함으로써 영적 혼합주의에 빠지게 한, 점술가 발람(수13:22, 민25:1-3, 계2:14b)과 니골라당의 음모에, 버가모교회의 일부가 동의했기 때문이다. 교회가 세상의 가치를 ‘극히 일부’라도 수용하면 ‘결국은 전체’가 영적인 음행에 이르게 된다. 번영을 기원하고 애국심을 표출하는 당연한 의무처럼 여겼던, 버가모에서 행한 당시의 상인조합의 제사도 그랬다. 우상에게 바치는 제사이며, 여사제와 육체적인 관계를 맺는 (영적으로도, 육적으로도) 음란한 축제였으므로 하나님 앞에서의 온전함을 유지할 수 없게 했다. 발람의 계략에 의해 최근에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결혼의 원리에 대한 무지와 무시, 자기중심적 사고, 부의 근원과 창출에 대한 청지기 의식의 결여,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에 대한 남용 등으로 인해, 복이 추악함으로, 파괴와 끔찍한 참상으로, 노동력의 착취로 이어지고, 하나님의 바른 통치를 본받는 권위와 질서를 따르지 않아 사람들을 고통 받게 하고 있다. 당시에도 이런 자들이 버가모교회 안에 침투해 있었다.
2-2.그래서, 신실함을 칭찬하신 후에, 주님의 입의 검(劍)으로 싸우시겠다고 하셨다.
비록, 일부지만 방치하면 전체를 변질되게 할 오염원에 대해 준열하고 구체적으로 지적하신 것이다.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해, 개성과 자율성, 다양성과 대중성이 중시되지만, 무엇이든지 반드시 (절대진리인) 말씀의 기반 위에서 이루어져야한다는 당위를 잊지 말아야 한다. 본질이 변하여 악취를 내는 혼합주의와 다원주의로 귀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말 신실했던 버가모교회에서 이런 죄악이 나타났음을 잊지 말자. 공동체뿐 아니라, 개개인에게도 적용해봐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아무리 신실해도 부지불식간에 진리를 벗어나 세상의 가치를 수용함으로써 믿음이 잠식될 수 있음을 기억하라! 그리스도의 편지와 향기가 아니라 발람의 간계와 악취가 될 수 있다.
3.(맺는 말)
아무리 열악한 환경에서도 진리는 역사하므로, 힘들지만 우리에게 허락된 자리를 지켜내자. 비록,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일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내는 자가 되자. 하나님은 이렇게 하는 우리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신다. 그리고 우리도 그 자리를 지켜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은혜의 부요함을 경험하고 누리게 된다.
공동체뿐 아니라, 우리 개개인도 언제든지 오염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늘 경계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진리위에서 이질적인 요소로 더럽혀지지 않은 순결한 신부로 세워지길 원하신다. 지극히 사소하더라도 은근하게 침투하는 혼합주의적 사고에 민감하게 대처해야 한다. 버가모교회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