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부

요한계시록 강해 15. 사탄의 깊은 것(계2:18-29)

(도입) 두아디라는, 고대사회에서 적의 공격에 취약한 평지에 있었다. 그래서 규모가 작았지만, 로마에 의해 유지되던 평화의 시절(:팍스로마나)엔 왕래가 활발한 교통의 요지로, 상업과 무역이 융성케 되는 이점이 있는 도시였다. 두아디라교회는 이러한 환경에서 세워졌다. 이 교회에 대한 주님의 자신에 대한 소개(:18)는. 앞서 언급한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두아디라교회의 상황과 긴밀하게 관련된 내용을 암시하고 있다.

1.자신을 ‘눈이 불꽃같고,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로 소개하고 있다.

①눈이 불꽃같으시므로, 어둠을 밝혀서 감춰진 모든 것이 드러나게 하고, 본질을 꿰뚫어 통찰하시는 분이심을 의미한다. 이와 더불어서 ②빛난 주석과 같은 발을 가지신 정복자요 심판자라는 묘사는 두아디라교회를 향한 주님의 말씀이 어떤 내용일 것인지를 예상케 한다. 또한 ③‘하나님의 아들’이라고도 명시하셨다. 두아디라가 제우스의 아들 아폴로를 숭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참된 신은 제우스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며, 아폴로를 숭배해야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경배해야 함을 내포한 묘사다. 주님의 자신에 대한 소개를 보면, 두아디라교회에 대한 혹독한 책망과 심판이 예상된다. 하지만, 주님은 꾸짖음과 진노에 앞서, 칭찬부터 하셨다. 연약하고 흠결이 많은 우리를, 긍휼의 눈으로 보시고 격려하시길 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두아디라교회가 행한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실뿐만 아니라, 처음보다 나중으로 갈수록 더 많이 수고하고 헌신했다는 사실을 안다고 하시며 칭찬하셨다(:19) 데살로니가교회에 대한 바울의 평가와 유사하다(살전1:3) 얼핏 보면, 사랑의 수고와 믿음의 역사, 섬김과 소망의 인내가 넘치는 좋은 교회였다. 하지만, 크게 책망 받을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2.자칭 선지자라는 이세벨의 가르침을 용납했기 때문이다(:20)

본문의 이세벨은 북 왕국 이스라엘의 악한 왕 아합의 배우자 이세벨과는 동명이인이다. 두아디라교회에 출석했다는 기록이 있다. 언변이 뛰어나고 설득력이 있어서 대중들이 심복하여 따르게 하는 능력이나 자질이 탁월했다고 한다. 이세벨은‘초월적인 능력과 예지력이 있는 존재’라는 의미로서의 ‘선지자’라고 자칭했다. 특별하고 초월적인 존재라고 느끼도록 현혹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한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깊이 헤아리고 이해한, 차원 높은 경지의 신앙인 것처럼 포장했다. 하지만, 주님은 사탄의 깊은 (흉계나 계략과 같은)것이라고 하셨다.

3.그렇다면, 이세벨의 가르침은 어떤 것이었을까? 결과로써 추정이 가능하다.

사랑의 수고와 믿음의 활동에 참여하며 섬김과 소망의 인내를 하는 교회가 당시의 지역사회와 구별 없이 영과 육으로 행음하며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었다는 사실은 교회에서는 성도의 모습이지만, 세상에서는 주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게 되었음을 뜻한다. 왜 이런 이중적인 삶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을까? 당시엔, 영과 육의 음행을 하는 상인조합에 속해야만 경제활동이 가능했다. 믿음을 갖고 싶으나, 사회적으로 매장되는 난관에 직면해야 할 것 때문에 갈등하던 이들에게 이세벨의 궤변은 변명과 피난처가 되었을 것이다. 이미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된 영적인 존재가 되었다면, 이후부터 땅에 속한 세상의 죄악된 것은 영적인 거룩함에 전혀 영향력을 끼칠 수 없게 된다는 영지주의의 이원론적인 논리를 주입시켰기 때문인 듯하다. 바울이‘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느냐의 여부에 얽매여 판단하고 정죄할 이유가 없다(고전8:4)’고 했던 말을 교묘하게 왜곡시켜 우상숭배를 합리화하면서 영육의 음행을 부추겼던 듯하다. 세상에서는 세상의 방법대로 살아도, 이미 받은 거룩함이 손상되지 않으므로, 교회에 있을 때만, 죄책감 없이, 말씀대로 사는 것에 대해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며 기만했다. 에베소 교회는 달랐다. 악한 자를 용납하지 않고 자칭 사도라 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분별했다(2:2) 우리도 에베소교회처럼 행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따르게 하는지 사람을 따르게 하는지 말씀과, 열매로 시험해야한다(골2:8-10)

4.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생존이 불가능한 상황을 선택해야 한다면 어찌 해야 할까? 

삼위일체의 교리를 주창했던 교부 테르톨리아누스(=터툴리안)는, 왜 굳이 이 땅에서 의와 진리의 거룩함을 회피하면서도 구차하게 살아남아야 하느냐고 반문했다. 예수를 믿는 것이, 이 땅에서 부요하고 건강하게 살기 위함도 아니고, 오래 살기 위함도 아니다.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는 광야에 혼자 버려진 것 같은 상황을 처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자신을 돌아보며, 왜 이런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는지,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말씀에 비춰봐야 한다. 하나님은 그곳에서도 함께 하신다. 그곳은 오직 주님만이 도움이시며 생명의 주인이심을 확인하고,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는 기회가  된다. 그곳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신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감추어진 만나를 주셨고 새 이름이 새겨진 흰 돌도 주셨음을 기억하라!

5.(맺는 말)

두아디라 교회는 사랑의 수고와 믿음의 역사, 섬김과 소망의 인내가 넘치는 참으로 아름다운 교회였다. 그런데, 이세벨의 간계로 인해 영적으로 타락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렇게 되지 않으려면 말씀으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인지 시험해봐야 한다.
주님께서 부르실 때 순종하여 이 땅을 떠나는 것이 진정한 복이다. 우리의 집은 하늘에 있다. 이 땅에 있지 않다. 그리스도의 사람이기에, 영생을 소유한 자로서, 세상에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보여주는 사명자임을 기억하자. 이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는 것이 우리의 존재이유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부여된 진정한 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