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부

요한계시록 강해 35.하나님의 진노와 십사만 사천(1) (계6:12-17)

(도입) 지난 시간, 다섯 번째 인(봉)을 열자, 순교자들이 신원해달라며 기도하는 것을 보았다. 그 기도의 결과가, 여섯 번째 인(봉)을 떼는, 오늘의 본문에서 드러난다. 여섯 번째 인(봉)을 해제하니, 큰 지진이 발생했다. 해가 빛을 잃어 어두워지고, 달빛은 피같이 되었다. 별들이 땅에 떨어졌고, 하늘은 두루마리처럼 말려 올라갔다. 산과 섬은 제 자리를 이탈하여 사라졌다. 이와 같은 광경은, 생소하지 않다. 성경에서 여러 차례 언급했었다(욜2:31, 사34:4, 마24:29) 본문은, 선지자들과 주님을 통해, 종말의 때에 대해 예언하셨던 그 말씀이, 마침내 실현되어 확증되는 순간을 묘사했다.
1.이 장면의 의미가 무엇일까? ①첫째는, 하나님께서 행하실 심판의 궁극이, 인간이 이 땅에 이룩한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전 우주적인 재난’임을 암시한다. 지금까지 경험했던, 전쟁이나 테러, 사고로 인한 인재나, 천재지변에 의한 참상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상상을 초월하는 재난이 실행될 예정이다. 이 세상은, 만유의 일정한 규칙에 따라, 늘 변함없이 조화롭게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그리고 이러한 질서가 앞으로도 영원하기를 바라는 자들도 적지 않으리라 짐작한다. 하지만, 성경은 이 모든 균형이 허물어지는 ‘대 파국’을 ‘반/드/시/ 맞게 된다’고 경고한다. 죄로 인해 오염된 이 세상은, 불완전하며 영원할 수 없다.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다시 새롭게 되어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마음을 뺏기지 말고 하늘에 소망을 두길 바란다. 이 땅은 하나님의 최종 심판의 때를 위하여 ‘한시적으로’ 유지되고 있을 뿐이다(벧후3:7)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시면서 거듭하여 설득하신다. 설복케 하시려고 기회를 주신다. 그러나, 마냥 기다리시지는 않으신다. 세상의 마지막이 ‘분/명/히/’ 온다. 끝내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에 직면하게 된다. ②이와 동시에, 무엇이 영원한지를 묻는, 질문과 답을 제공하는 사건이다. 영원하리라 생각했던 모든 이치가 파괴되어 멈추는 날이 있음을 적시한다. 이 땅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하여야만 소멸되지 않고 멈춤도 없이 영원히 존재함을 일깨워주신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백성이 영원함을 말씀하신다. 또한,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초월한 존재이시며, 그 피조물들이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음을 가르쳐주신다. 모든 피조물을 통치하시고, 제어하시는 하나님은, 그 어떤 것에게도 영향을 받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진노로 인한 심판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참혹한 재난이다. 이를 미리 알려주셨다. 우리가 공포에 휩싸이도록 내모는 으름장이 아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반드시 실현된다는 경고이자, 하나님께 속해야만 영원히 존재하고 굳게 선다는 가르침이다. 잊지 말고 명심하라! 하나님만이 참된 피난처이며, 영원한 안식처다.
2.이를 뒤이어, 땅의 각 계층에 임한, 심판과 심판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살펴보자. 그들은 두려움 때문에, 굴과 바위틈에 숨었다.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양의 진노로부터 숨겨지길 원했다.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모든 이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심판에 직면하게 된다. 지위와 권력, 권세와 소유가 아무리 대단해도 피할 수 없다. 이뿐만 아니라, 종이나 서민이라 할지라도 심판을 면할 수가 없다. 이들은 힘이 없어서 억압받으며 살았다. 억울한 일도 많이 겪었다. 그렇기에, 심판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납득하기가 쉽지 않을 수 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잠재된 선입견 때문이다.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도덕이나 윤리적 차원이 아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편에 있느냐의 여부로만 결정된다. 도덕과 윤리적 측면의 비교우위가 구원받음을 판단하지 않는다. 즉, ‘선하게 살았느냐, 아니면 악하게 살았느냐’로 구원이 결정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써만 구원받기 때문이다(요일5:12) 기독교 신앙은 윤리와 도덕을 초월한 상위 개념이다. 그래서, 당연히 윤리적이고 도덕적이다. 안타깝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신앙과 믿음을, 도덕과 윤리의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어리석음을 자주 범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을, 도덕과 윤리의 범주에 매몰시켜 폄하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신앙은 인격적이어야만 한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신앙의 기준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아야 한다는 뜻이다. (양심과 윤리와 도덕적으로) ‘선한 일이므로 행하고, 악하므로 피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인지를 항상 염두에 두고’ 이에 따라 마음과 행동의 대응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우리가 구원받은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오직 이것만이 유일한 구원의 요건이다.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며, 하나님을 닮아가고자 하는 모습이 인격화되어야 한다.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삶의 변화를 ‘신앙의 인격화’라고 한다. 구원의 기준이 이렇기 때문에, 비록 종이나 서민이라 할지라도 심판에 대한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우리가 선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삶의 가치를 고양시켜주고 보람이 되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마땅히 선한 삶을 살아야 한다. 또한, 이에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원수조차도 사랑하는 삶’을 영광스러움으로 알고 (백색)순교의 삶을 살아내는 자가 되어야 한다(마5:43-48)
3.(맺는 말) 하나님의 심판의 목적은 두려움과 공포를 주기 위함이 아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다. 모든 만물이 하나님을 의존해야 하는 존재임을 일깨워주신다. 이 땅에 있는 것은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다. 반드시 심판하신다. 하나님께 속해야만 영원하다. 우리는 ‘어떤 삶으로, 무엇을 위해’ 부름을 받았는지를 점검해보길 바란다. 이와 더불어, 우리 개개인과, 배우자와 자녀, 부모와 형제를 위한 영원의 준비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엡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