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부

요한계시록 강해 18.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계3:1-6)

(도입) 사데교회는 삼면이 산에 의해 병풍처럼 둘러쳐 있고 앞에는 강이 흐르는 고원지대에 입지한 천혜의 요새였다. 외부의 침략에 대해 온전히 보호받을 수 있는 안전한 곳이었고, 강에는 사금이 풍부하여 금화를 최초로 제조했던 도시로 경제적으로도 몹시 부유했다. 이것이 어쩌면, 사데교회가 신앙적 안일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갈급함이나 영적인 갈증이 없었던 원인이 아닌가 생각한다. 고난이나 역경이 없다고 해서 반드시 사데교회처럼 전락한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하지만, 교회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세상과 부딪힘이 없고, 이로 인한 난관이나 갈등이 전혀 없다면, 반드시 점검해봐야 한다. 주님으로부터 칭찬과 동시에 책망을 받은,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교회는 교회외부의 공격과 저항이 있었다. 사데교회는 달랐다. 외부의 도전이 없었다. 이는, 영적으로 정말 심각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외부의 공격은 교회를 긴장하게라도 하지만, 전혀 없다면 영적인 침체에 빠져 교회가 안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1.이처럼, 끊임없는 ‘영적 갈등과 고민과 의문’이 부정적인 측면만 있지는 않다.

극복하면 오히려, 믿음을 더욱 온전하고 성숙하게 하는 촉진제가 된다. 정금같이 빚어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이라 할 수도 있다. 주님께서는 사데교회가 믿음의 공동체가 아니므로 죽은 자라고 하셨다(마25:31-46) 얼핏 보면, 활발하게 모이고 여러 가지 종교적인 활동을 열심히 하는 활력이 충만한 교회였을 것이다. 때로는 구제도 하고 복음도 전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이나 지역사회의, 가치관과 세계관의 차이나 갈등 없이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세상을 향해, 아무런 영적인 영향력도 끼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라고 하셨다. 회칠한 무덤과 같은 교회란 뜻이다. 외형은 아름답고 화려하게 보이지만 시체이므로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고 부패하여 악취만 내기 때문이다.

2.그렇다면,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는 구체적으로 어떤 자일까?

한마디로, (외로움을 떨쳐버리려) 향락을 좋아하는 자다(딤전5:6) 믿음의 사람이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나쁘다는 의미가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 근본 이유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보다는 단순히 마음의 평안과 안위를 얻기 위한 경우를 말한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전투하는 교회로서의 영향력을 미칠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려는 목적만 있지 않다. 하나님의 선한 영향력을 세상에 드러낼 사명자로 세우시기 위함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자는 성도로서의 존재의미 자체가 없다. 사데교회를 향한 주님의 칭찬이 한마디도 없었던 이유가 이 때문인 것 같다. 사데교회는 외부의 도전도 없고, 신앙생활에 걸림돌이 될만한 난관이나 역경, 고난, 핍박이나 억압도 없는 교회였다. 심지어는 앞에서 언급한 네 교회와 달리 (사탄이 배후에서 조종하는) 이단의 공격도 없었다.

3.사데교회는, 왜, 이단의 공격조차 받지 않았을까?

(이단의 배후에 있는 사탄의 입장에서 볼 때) 공격할만한 가치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다. 그런데, 사데교회는 영적 전투에 대한 관심뿐만 아니라, 준비와, 열정도 없었다. 성도들과의 교제를 통해 외로움을 해소하고, 예배의 경건함에 힘입어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카타르시스)을 맛보려는 의도로 교회에 출석했기 때문인 듯하다. 선교, 구제, 섬김, 등등도 자신의 만족감과 스스로를 인정받기 위한 욕구를 채우기 위해 행했을 것이다. 즉, 사데교회는 믿음으로 허락받은 구원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던 교회다. 자신이, 이 구원 안에 있는지 질문하고 확인하며, 자신이 가는 길이 바른 길인지 찾으며 갈등하는 모습도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나 성찰도 없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거나 갈구하는 일도 없었다.

4.만약,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실마리를 찾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주님은 ‘(복음을)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3:3a)’고 말씀하셨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다. 그 핵심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허물과 죄로 이미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이신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살리셨다는 사실이다. 이를 믿는 모든 이들에게 죄사함의 은혜와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는 은혜를 허락하셨다. 이러한 은혜를 계속해서 떠올리고 기억함으로써 자신이 어떤 존재였었는지 잊지 말고 늘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 해결할 수 있다는 뜻이다. 십자가에는 주님의 희생과 고난과 섬김, 사랑과 은혜와 용서와 순종, 그리고 이를 통한 영광이 있다. 이러한 사실들을 끊임없이 묵상하고 일깨워야 한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신 이러한 모습들로 스스로의 삶을 채우려 하면서, 과연 그렇게 하고 있는지 늘 점검해야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5.(맺는 말)

바울은 십자가외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다(갈6:14) 그리하여 세상에 살고 있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늘에 속한 자로 살았다. 믿음의 여정에서 아무런 고난이나 역경이 없어서 십자가를 잊었다면, 사데교회와 같은 길을 걷게 될 수도 있음을 기억하라(히12:8)
전투하는 교회로서의 사명과 정체성을 끊임없이 되새기며 기억하고 묵상하라! 이 땅에 살면서 끊임없이 야기되는 영적인 의심과 질문들에 대해 무관심하게 흘려보내지 말라! 이것에 대해 갈증을 느끼면서 갈구하라! 왜, 자신에게는 십자가와 부활의 영광과 열매가 없는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와 기쁨과 감격이 지금은 왜 흐려졌는지 고민하고 성찰하라! 회복하기를 위해 애통하며 갈구하고 애쓰는 자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