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입)
지난 주일까지는 계시록의 본론과 결론을 함축하여 표현한 서문에 해당하는 부분을 함께 상고해봤었다. 핵심내용은 승리하신 예수그리스도다. 이 승리는 성삼위 하나님의 협력으로 반드시 성취되는데, 이를 완성하는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이 속히, 그리고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오늘부터는 이와 같은 과정을 보다 구체적으로 세밀하게 살펴보길 원한다.
1.사도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함으로 인해 밧모섬에 유배되었다(1:9)
밧모섬은 화산폭발로 형성된 바위섬이다. 척박한 불모지였기에 사람이 살기 힘든 무인도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로마의 건축물의 재료가 되는 석재의 채취가 용이하므로 죄수들의 노동력으로 운영하는 채석장이 있었다. 이미 90대의 고령이 된 사도 요한은 그곳에서 노구를 이끌고 휴일도 없이, 감당하기 힘든 고된 노동에 시달렸다. 장시간의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성도들과 격리된 정신적 고통과 외로움도 상당했으리라 생각한다. 이렇게 모든 것이 열악한 상황에서도 성령에 사로잡힌 예배의 삶, 성령에 감동받아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1:10) 묵시가 있던 그날도 그랬다. 부활하셔서 참 생명이 되어주신 예수그리스도를 생각하며 성찬을 통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나누면서 참 생명의 기쁨을 성도들과 함께 하던 주의 날의 예배를 통해 성령에 감동되어 있었다. 바로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왕의 귀임과 행차를 상징하는 나팔소리 같이, 웅장하고 장엄하며 위엄이 있어서 압도당할만한 음성이 들렸는데, 지금부터 보는 것을 기록하여 일곱 교회와 공유하라고 했다. 돌아보니, 일곱 금 촛대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있었다. 머리와 털은 눈(雪)이나 하얀 양털인양 희었다. 눈(眼)은 불꽃처럼 보였으며 발은 풀무불에서 단련한 빛난 주석 같았고 음성은 많은 물소리를 연상케 했다. 오른손에는 입곱 별이 있고 입에서는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치는 것 같았다
2.이제, 이러한 면면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자.
다니엘서에서 묘사했던, 인자 같은 이는 심판주로 오시는 참 하나님을 나타낸다. 이는, 요한이 목도하고 있는 환상에 하나님의 뜻이 내포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발에 끌리는 흰 옷은 대제사장의 의복이다. 죄인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가 되어서 인간의 모든 연약함과 죄악을 해결해 줄 참된 ①대제사장을 의미한다. 금띠는 ②왕의 권세와 부요함의 상징이며, 또한 ③선지자도 되시기에 그 입에서 말씀의 검이 나온다고 표현했다. 발은 기존의 질서를 압도하는 영광스럽고 완전한 능력, 흰 머리는 영광과 위엄, 백발의 지혜와 명철의 면류관과 지혜를 상징한다. 불꽃같은 눈으로 모든 것을 통찰하시며, 그의 오른손에는 교회를 보호하고 지키는 역할을 하는 일곱별이 있었다.
일곱별의 주인이신 그가 전에는 죽었다가 이제는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시며, 부활의 주님이신 성자 하나님이시다. 이는, 사도 요한이 받은 묵시가 예수그리스도의 뜻을 반영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3.그런데, 예수님은 왜, 굳이 이런 모습으로 등장했을까?
왜냐하면, 당시의 교회가 환란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버텨내고 있지만 두려움과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의심과 회의에 발목을 잡힐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다 분명하고도 정확하게 계시하여 확인시켜주심으로써 환란과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가장 확실한 위로와 힘과 능력을 부여하길 원하셨기 때문이다.
4.이토록 놀라운 사건은 주의 날(=주일), 예배 중에 일어났다.
‘주의 날’은 주님께서 재림하셔서 심판하시는 날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본문에서는 안식일(토) 후의 첫날로 주일을 뜻한다. 그런데, 당시에 대다수를 차지하던 이방인 성도들은 주일을 로마의 태양신을 숭배하는 날로도 이해하고 있었다. 성도에게 이 날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이다. 부활의 영광과 생명을 성만찬을 나누며 함께 누리는 날임을 분명하게 각인시켜 주실 뿐만 아니라, 고통과 환란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만나주시고 위로(:17)하시면서 힘주시고 사명(:11)을 부여하시는 은혜가 임하는 날임을 일깨워주시기 위해 주의 날에 찾아오신 것이다. 이는 매일의 삶의 예배 못지않게 성도들이 함께 모여 성찬을 나누는 공동체의 예배가 참으로 중요함을 웅변한다. 그렇다면, 환란이나 고통 중에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어떨까? 진정으로 예수를 믿는다면 세상의 가치관과의 충돌로 인해 조롱과 미움과 따돌림은 필수적으로 따른다. 뛰어난 학벌과 유망한 직업이 미래를 보증하지 못한다. 믿음을 지키면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불이익을 감수하는 힘은 주일에 함께 모여 드리는 공동체의 예배를 통해서 얻어진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해주신다.
5.(맺는 말)
예수를 믿는 것은 그 자체로 이 세상에서 고난을 자초한다. 주의 말씀과 주님의 삶을 증거하는 삶은 더욱 그렇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소망 중에 인내하고 견뎌내며 은혜를 누림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감으로써 믿음의 다음 세대를 세워가려면 바른 예배자가 되어야 한다. 이 일은 예배가 시작이고 중심이 된다. 가정과 직장과 삶의 현장에서 거룩한 영적 제사를 드림과 동시에,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의해 누리는 은혜를 생각하며 함께 모여서 드리는 주일의 공동체 예배를 사모하라.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만나주셔서 인격적으로 더 깊은 교제를 통해 격려해주시며 위로해주시고 사명을 주신다. 이러할 때, 믿음의 부요함을 누리게 되고 자녀들이 믿음의 다음세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