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부

요한계시록 강해 53.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계15:1-4)

(도입) 일곱 나팔의 재앙에 대한 묘사 이후의 막간은,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의 영적의미와 영적 전투의 과정들에 대해 기록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함축된 구원과 심판의 역사다. 이러한 막간이 끝나자, 드디어 일곱 대접의 재앙에 대한 장면이 시작된다.
1.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사도요한에게, 크고 이상한 이적을 보여주셨다.
‘크다’는 ‘광대하다’라는 뜻이고, ‘이상하다’는 ‘놀랍고 경이롭다’는 의미로 쓰였다. 이처럼, ‘광대하고 놀랍고도 경이로운’ 이적은, 일곱 천사를 통한 일곱 재앙이다. 이 재앙을 ‘마지막’ 재앙이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마지막’은 ‘시간적 순서의 개념’으로서의 ‘마지막’이 아니다. ‘완료, 완성, 종결’의 의미다. 부연하자면, 맨 처음, 인의 재앙이 일곱 번 있고나서, 그 후에 나팔의 재앙이 일곱 번 나타나고, 마지막으로, 대접의 재앙이 일곱 번 행해진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동일한 재앙의, 다양한 특성을 알려주기 위해, ‘재앙의 비밀을 여는 시작의 의미’를 부여한 인(봉)으로, 그 다음은 ‘경고와 심판’을 뜻하는 나팔로, 가장 마지막은,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져서 완결되는 대접에 의한 재앙으로, 반복해서 표현했을 뿐이다. 그림을 그릴 때, 맨 먼저 연필로 간략히 그린 후(=인), 점차 더 세밀하게 윤곽을 다듬고(=나팔) 마지막으로, 거기에 색을 칠하여(=대접) 완성하는 과정으로 이해하면 쉬울 것 같다.
2.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또 다른 환상에 대한 묘사를 삽입하고 있다.
이 환상에는 불이 섞인 유리바다가 있다. 악의 근원을 의미하는 바다가 심판의 도구인 불에 의해 유리같이 잔잔하게 평정되어 ‘질서’가 세워졌음을 보여준다. 죄악에 의한 ‘혼돈과 무질서’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회복됨으로써’ 다시 질서를 갖게 되었다는 뜻이다(창1:2) 장차 임할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다. 유리바다 가에는,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십사만 사천이 서 있다.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은 우리도 거기에 서게 된다는 암시다. 그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거문고(= 비파, harps)를 가지고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 모세의 노래는, 홍해를 건넌 후, 이스라엘과 함께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한 노래’이며(출15:2) 가나안 입성을 눈앞에 두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과 심판이 완전하고 공의로우며 참되다‘고 고백한 찬양이다(신32:4) 모세의 이러한 찬양이, 어린양의 노래가 된다. 앞으로 이루어질, 크고 놀랍고 경이로운 사건인 일곱 대접의 심판으로 인해서 완성될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는, 모세의 노래가 어린양의 노래로 완성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 찬양은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하고 끝맺는다. 향후에 전개될 일곱 대접의 재앙이, 너무나 끔직하여, 엄청난 공포와 두려움을 준다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오히려 구원에 대한 찬양이 되고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확인하는 현장이 된다는 사실을 미리 말씀하신 것이다.
3.그렇다면, 왜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 장면을 삽입했을까?
앞으로 전개될 일곱 대접의 재앙이 엄청나게 크고 놀라우며 두려운 재앙이지만, 이 재앙은 성도로 하여금, 어린양의 구원과 그의 심판의 의로우심과 참되심으로 인해, 모세의 노래처럼 노래할 사건임을 미리 알려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 때문이다. 이 환상이 진행되는 동안,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이지 않도록, 세심하게 다독이시며 격려하심으로써 소망과 기대 가운데 믿음의 걸음을 걸어가도록 하시기 위함이시다.
4.여기서, 우리는 찬양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봤으면 한다.
자신의 마음이 위로 받고 평안을 얻는 것이 찬양의 근본 이유와 동기가 될 수는 없다. 찬양은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에 대한 노래다. 이러한 찬양으로 들어가려면, 모세가 찬양하던 홍해로 가야 한다. 그들은 말할 수 없는 감격과 기쁨으로, 참으로 놀라우신 하나님을 찬양했다. 억압과 핍박 중에 예속되어 소망이 없었으나,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로 속박의 굴레와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났다. 하나님께서는 능력으로, 바다를 가르고 그 가운데를, 마른 땅을 지나듯 걸어서 지나가게 하셨다. 추격하던 모든 적들을 수장시켜버리심으로써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보여주셨다. 이렇게 놀라운 일을 행하신 하나님의 은혜로우심과 능력을 어떻게 찬양했을지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우리는 여기서, 찬양의 자세와 태도 또한 돌아봐야 한다. 우리가 받은 구원과 우리가 드리는 찬양이, 홍해를 걸어서 건넜던 이스라엘의 찬양과 같이 되기를 바란다.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함을 오해하거나 착각하지 마라. 삼가며 엄숙한 태도를 취하는 것만이 경건이 아니다. 사모하던 언약궤가 들어오는 장면에 감격하여 어린아이 같이 즐거워하며 춤을 췄던 다윗의 모습이 경건이다(삼하6:16) 그런데, 왜 이러한 기쁨과 감격이 없을까? 그 이유는, 애초부터 하나님의 일하심과 공의로우심과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이 무엇인지를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예전에 충만했던 은혜를 지금은 잊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한 찬양과 감격이 식어져서, 하나님의 일하심의 참되심과 의로우심을 느끼지도 못하고 누릴 수도 없는 답답한 상태가 되었다면, 자신의 심령의 상태를 살펴서 하나님의 은혜로 심령을 채워야 한다. 찬양은 영적 상태를 가늠할 수 있는 잣대다.
5.(맺는 말)
우리의 찬양이, 새 노래로 채워진 많은 물소리와 같은 찬양이 되길 바란다. 우리 모두는 한사람도 빠짐없이, 새 노래의 웅장함과 감격에서 우러나오는 찬양을 부르는 자가 되길 기도한다. 십사만사천이 부르는 모세와 어린양의 찬양을 생각하며, 우리에게 이미 허락하신 놀라운 구원을 깊이 묵상해보자. 이를 통해, 찬양을 회복하고 그 찬양 안에서 기쁨과 감격으로 채워진 삶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