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부

요한계시록 강해 70.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간 데 없더라(계20:11-15)

(도입) 본문이 있는 요한계시록 20장은, 요한계시록을 개관(槪觀)하고 있다. 첫 부분은, 주님의 십자가에서의 승리로, 사탄이 결박되어 무저갱에 갇힌 (상징적인) 천년동안 교회가 왕 노릇 하는 묘사로 시작한다. 이어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간이 채워지는 그 때, 잠시 풀려났던 마귀와 그 하수인인 짐승과 큰 음녀가 아마겟돈 전쟁을 일으켰다가 일망타진되어 불과 유황의 못에 던져지는 심판을 받는 장면을 서술했다. 말미에 해당하는 오늘은, 예수님을 믿지 않은 자에 대한 심판이다(마25:32-33)
1. 본문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는 장면’ 으로 시작한다(:11)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이시라는 사실을 명시하는 구절이다. 크고 흰 보좌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대한 편지이후, 열려진 하늘에 등장했던 보좌다. 인(印)과 나팔과 대접의 심판이,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가운데 진행됨을 암시한다. 심판의 절정을 이루는 최후의 순간도, 오직 하나님만이 주관자 되심을 나타낸다. 보좌가 ‘크고 희다’는 표현은, 이 보좌의 심판이 ‘위엄과 거룩함’ 중에 진행됨을 부각한다. 이로 인해, (이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을 지칭하는) ‘땅과 하늘’이, 하나님 앞에서 도망쳐 종적을 감췄다. 심판이 너무나 두렵기 때문이다.
2. 이어서, 그 자리에 ‘죽은 자들’ 이, 크고 흰 보좌 앞에 선다(:12a) 이 땅에서의 지위나 능력이나 권세와 무관하다.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보좌 앞에 선다. 그 앞에는 두 종류의 책이 펼쳐져 있다. 생명책과 ‘죽은 자(:12b)의 행위가 기록된 책’이다. 죄악의 본거지를 상징하는 바다와 사망과 음부가 ‘죽은 자’를 내어준다. 본문의 ‘죽은 자’는 (영과 육이 분리되는 죽음을 당한 자 중에서,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에) ‘죄의 권세 아래 있게 된 자에 한정한’ 표현이다.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를 가리킨다. 그들은 이 땅에서의 악한 행위를 근거로 심판을 받는다. 사탄의 하수인 노릇한 짐승과 그의 표를 받은 자와 큰 음녀다. 이 모든 자는. 불과 유황의 못에 던져져 (하나님과 영원히, 비가역적으로 분리되는) 둘째 사망을 당한다.
3. 그러면, 생명책에는 무엇이 기록되어 있을까?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이들의 ‘행위’에 대한 내용일까? 아니다. 우리의 행위는 기록되지 않는다. 구원받은 성도인 우리의 ‘이름만’ 기록된다(21:27) 우리의 행위가 기록되지 않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심판의 근거가 될) 우리의 허물과 죄가 모두 가려졌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유월절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의 피를 보시고 우리의 허물과 죄를 의지적으로 간과하셨다. 구원의 근거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에 있기 때문에, 굳이 우리의 행위를 기록할 필요가 없다. 이와 달리, 그리스도의 은혜를 거부한 자는, 그의 행위 때문에 심판을 받는다.
4. 이렇게, ‘생명책’과 ‘죽은 자의 행위를 기록한 책’ 을 대조시킨 이유가 뭘까?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 되었던 자와,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그의 통치를 받던 자를 구분하기 위함이다. 자신의 생각과 경험과 지식을 따라 삶을 영위한 자들이, 아무리 도덕적으로 완벽하며, 선하다고 인정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 도덕적 경지가 최후의 심판을 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뜻이다. 이에 반해, 비록 연약하고 허물 많은 삶일지라도,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의탁하는 성도의 삶은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기쁘게 받으신다’ 는 사실을 극명하게 대조시키고 있다. 우리 죄에 대한 심판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받으셨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한 우리에게는 ‘심판이 이미 끝났다’ 는 뜻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믿음의 삶을 살아내려는 몸부림을 폄하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파렴치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준다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행위대로 갚아주신다(계2:23, 14:13, 18:6)’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난감해지기도 한다. 이 구절의 ‘행위’ 는 구원을 위한 필수 요소가 아니다. 이 땅에서 믿음을 지키려 인내하며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내는 거룩한 산 제물로서의 삶을 말한다. 이러한 행위에 대해 하나님께서 ‘보상해주신다’ 는 뜻이다. 이제 우리에게는,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생명책’에 기록된 우리의 이름을 확인하고 감사하며 찬양할 일만 남았다.
5. 그런데, 본문에‘땅과 하늘이 그 앞에 피하여, 간 데 없더라’는 구절이 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위하여 ‘옛 하늘과 옛 땅이 사라졌다’ 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하늘과 땅도 도망할 만큼 두려운 심판이라는 사실의 은유적 표현이다. 이 세상의 가치와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엄위하신 심판을 감당할 수 없다는 뜻이다(cf.계6:12-14)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이 땅에 있는 그 무엇도 우리를 지켜주거나, 보호해 줄 수 없다. 우리가 온전히 의지하고 의탁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여호와 한 분밖에 없다. 그분만이 우리의 참된 안식처요. 굳건한 산성이시다. 그리스도와 함께 그 안에 있어야 하고, 이미 그 안에 있는 자들은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사43:1b) 그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롬8:39)
6. (맺는 말)
때로는, 불신자를 향한 선(善)한 평판 때문에, 우리 자신이 더욱 초라해져서 낭패감을 느낄 때가 있다. 하지만, 선(善)한 행위는 구원으로 이끌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스스로 하나님의 의와 진리의 거룩함에 이를 자는 아무도 없다(롬3:23) 이 세상을 의존하거나 소유함으로써 안전을 담보하고, 복된 삶을 살 수 있으리라 착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명심하라!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어떠한 가치도 없고 아무런 능력도 없다. 우리가 의존하며 의탁할 분은 오직 성삼위 하나님뿐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