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부

변화와 성숙으로 이끄는 7가지 성경읽기 원리(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 길성남 / 성서유니온)

변화와 성숙으로 이끄는 7가지 성경읽기 원리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길성남/ 성서유니온]
1. 천천히 더 천천히천천히 주의 깊게 읽기
독서의 제일 원칙
주의를 기울여 천천히 읽는 것은 모든 독서의 기본입니다. 에밀 파게는 “천천히 읽는 것, 이것이 첫 번째 원칙이며 모든 독서에 절대적으로 적용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글에는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있기 마련입니다. 글의 핵심을 찾아내려면 글자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저자가 글 전체에서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헤아리며 읽어야 합니다. 중요한 글이나 책일수록 천천히 읽어야 합니다. 삼권분립을 주장한 프랑스 사상가 몽테스키외는 ‘법의 정신’이라는 저서를 완성하는 데 무려 20년의 세월을 보냈다고 합니다. 유럽 최고의 지성인 몽테스키외가 오랜 시간 혼신의 힘을 다해 완성한 역작을 한두 시간 안에 독파한다면 그 내용을 모두 이해할 수 있을까요? 아무리 좋은 책이라 하더라도 여기저기 건너뛰면서 빨리 읽는다면 책의 중요한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고 책에서 얻는 것이나 배우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빨리 읽으면 그만큼 놓치는 내용이 많아지기 마련입니다.
많은 사람이 속독을 선호하고, 빨리 그리고 많이 읽기를 권하ᅟᅳᆫ 시대에 천천히 읽기를 권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일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속독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속독이란 그저 나열된 사실들을 주워 담고 신중한 독서를 고사시키는 데에나 쓸모가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책이나 문서는 가벼운 마음으로 빨리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자가 한 줄 한 줄 목숨을 걸고 써내려간 책이나 문서를 어떻게 가벼운 마음으로, 그것도 빨리 읽을 수 있겠습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성경이야말로 가장 진지한 자세로 주의를 기울여 천천히 읽어야 할 책입니다. 성경은 때로 읽기를 멈추고 눈을 감은 채 방금 읽은 구절을 다시 생각하면서 그 의미가 핏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끼는 방식으로 읽어야 합니다. 이것은 말씀을 씹고 또 씹으면서 그 의미를 되새기고 삼킴으로써 마치 음식이 위장으로 들어가듯 말씀이 영혼으로 들어가게 하는 방식의 읽기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성경을 읽으려면 천천히 주의 깊게 읽는 것부터 배워야 합니다. 귀 기울여 듣는 자세로 주의 깊게, 천천히, 반복해서 읽는 것이야말로 성경읽기의 첫째가는 원칙입니다. 성경을 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받아들인다면, 하나님을 향해 완전히 마음을 열고 하나님이 알려 주시고자 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천천히 읽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다른 책과 마찬가지로 성경도 빨리 읽으면 많은 내용을 놓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 명령하시는 것을 잘못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오독의 문제
오독의 문제를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본문을 잘못 읽거나 왜곡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귀 기울여 듣는 마음으로 주의 깊게, 천천히, 반복해서 읽는 것이 오독의 문제를 줄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주의를 기울여 천천히 읽기
본문의 세부적인 묘사나 대화를 천천히 읽으면서 주의 깊게 살펴보면 본문의 상황과 내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단락 중심으로 읽기
성경 본문을 주의 깊게 천천히 읽어야 하지만, 그렇게 읽는다고 해서 반드시 본문의 내용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천천히 읽으면서도 얼마든지 자기 마음에 드는 본문을 골라 읽거나 자신에게 필요한 구절을 찾아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기 마음에 드는 구절이나 은혜롭게 느껴지는 구절에만 주목하면 다른 구절들은 무시하고 지나칠 수 있습니다.
성경 본문의 내용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본문을 주의 깊게 천천히 읽되 마음에 와 닿거나 은혜롭게 느껴지는 구절 중심으로 읽지 말고 단락 중심으로읽어야 합니다. 단락이란 글쓴이의 생각을 전달하는 단위로, 짧은 이야기 토막이나 하나의 완결된 생각을 나타내는 문장들의 집합입니다.
성경의 저자들도 하나님의 뜻을 단락의 일부가 아니라 단락 전체를 통해 표현합니다. 은혜롭게 느껴지는 구절이나 마음에 와 닿는 문장도 단락의 일부입니다. 절이나 문장은 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무들이 모여 숲을 이루듯이 구절들과 문장들이 모여 하나의 단락을 이룹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내용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절이나 문장 중심으로 읽지 말고 단락 중심으로 읽어야 합니다. 물론 잠언이나 서신서의 경우에는 한 문장에 독립된 하나의 사상이나 하나님의 뜻이 담겨있고, 복음서나 역사서의 경우에는 여러 개의 단락이 하나의 큰 단원을 구성하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단락 중심으로 성경 본문을 읽어야 한다는 원리를 너무 엄격하게 적용하면 안 된다는 시드니 그레이다누스의 지적은 옳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성경 저자가 본문을 단락 중심으로 기록한 것이 사실이므로, 더 넓은 문맥을 고려하면서 단락 중심으로 본문을 읽는 것은 타당하고 건전합니다.
단락 중심 읽기란 본문의 단락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확인하고 단락 전체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차근차근 읽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정 구절이 마음에 와 닿더라도 그 구절에 주목하기 전에 단락 전체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무 하나하나에 주목하기 전에 숲 전체를 조망하는 것과 같습니다. 단락 전체의 내용을 이해한 뒤에는 단락을 구성하는 문장들을 차례로 살피면서 단락의 주제를 파악해야 합니다. 주제란 본문에서 성경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중심적인 생각입니다. 또한 주제는 본문에서 다른 모든 요소를 압도할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모두 포괄하는 하나의 요점입니다. 주제를 찾는 것은 본문에서 주변적인 것이 아니라 핵심적인 것에 주목하려는 시도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으려는 노력입니다. 성경 저자들은 대체로 단락의 도입 부분이나 마지막 부분에서 주제를 제시합니다. 이런 경우에는 첫 문장이나 마지막 문장만 읽어도 쉽게 주제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락 전체를 반복해서 읽고 문장들을 세심하게 살펴야 비로소 주제를 알 수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단락 안에 있는 문장들을 차례로 살필 때는 먼저 각 문장의 주어와 동사를 찾아야 합니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대체로 주어와 동사로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목적어가 있는 문장일 경우에는 목적어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수식어들은 주어와 동사와 목적어를 찾아 문장의 핵심 내용을 파악한 뒤에 살펴봐도 늦지 않습니다. 문장의 기본 구조를 파악하면 아무리 복잡한 문장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장을 분석하는 목적은 주어와 동사를 찾는 것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문장에서 저자가 무엇을 말하는지를 파악하는 데 있습니다.
문장 하나하나의 내용을 파악함과 동시에 문장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으며, 그러한 결합을 통해 드러내는 요점이 무엇인지도 살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는 문장들을 잇는 접속사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특히 ‘그러나’라는 역접 접속사와 ‘그러므로’ 또는 ‘그런즉’과 같은 결론을 이끄는 접속사가 중요합니다. ‘그러나’는 앞에서 말한 내용과 대조를 이루거나 반대되는 생각을 나타냅니다. 대체로 이 접속사 앞에는 저자가 부정하거나 반대하려는 생각 또는 사실이 나오고, 뒤에는 저자 자신의 생각이 이어집니다. 따라서 역접 접속사로 시작하는 문장에 주목하면 저자의 생각이나 주장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와 ‘그런즉’과 같은 접속사로 시작하는 문장에는 저자의 중심 사상이 담겨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리고’라는 접속사에 유의하면 사건이나 논리의 전개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또한 원인과 결과를 제시하는 문장, 목적과 이유를 밝히는 문장, 특정한 사실이나 주장을 제시하는 문장에도 주의를 기울어야 합니다. 중요한 접속서에 유의하고 문장들의 관계와 역할을 구려하면서 본문을 읽으면, 문장들과 단락을 통해 이어지는 저자의 논증이나 사건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고, 단락 전체에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방식의 성경읽기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여전히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나 문장을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 적용하려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마음에 와 닿은 구절이나 문장이 단락의 핵심일 수도 있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성경 본문의 자연스럽고 문법적이며 역사적인 의미와 전혀 다른 메시지를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알려면 건전한 성경읽기 원리를 따라서 본문을 읽어야 합니다. 버낟 램이 잘 지적한 대로, “하나님의 뜻은 오직 성경이 문법적 원칙에 따라 말하는 것에 의해, 또는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지고한 영적 원리들에 의해 확정되어야” 합니다. 어떤 구절이나 문장이 마음에 와 닿는 경우에 그것이 참으로 하나님의 뜻인지 단락 전체에 비추어 확인해야 합니다. 영성이 깊은 독자일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듣고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그리고 적절하게 응답하기 위해, 성경 본문의 단어들과 문장들을 하나하나 신중하게 살핍니다. 성경은 천상의 언어가 아니라 지상의 언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성경 본문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단어들의 의미를 파악해야 하고, 지도에서 성읍들을 찾아보아야 하며, 고대의 관습들을 연구해야 합니다. 이처럼 성경을 이해하려면 많은 수고가 필요합니다.
맺는말
귀를 기울여 듣는 자세로 주의 깊게 천천히 반복해서 읽는 것은 성경 본문에서 저자가 말하는 바를 파악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방식입니다. 성경을 빨리 읽으면 본문을 부주의하게 읽거나 잘못 읽을 수 있고, 본문의 중요한 사항들을 지나칠 수도 있습니다. 본문을 바르고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반드시 신중한 자세로 천천히 반복해서 읽되, 마음에 와 닿거나 은혜롭게 느껴지는 구절이나 문장 중심으로 읽지 말고 단락 중심으로 읽어야 합니다. 먼저 단락 전체를 반복해서 읽으며 중심 내용을 파악하고, 이어서 문장들을 하나하나 주의를 기울여 읽어야 합니다. 주어와 동사를 찾아 문장의 핵심 내용을 파악하고, 단락 안에서 각 문장의 역할과 문장들 사이의 관계를 고려하면서 읽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본문에서 성경 저자가 말하는 바를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제임스 사이어는 독자들에게 “앞으로는 주의 깊게 읽어야겠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말라”고 조언하면서 “진지한 일(설령 즐기기 위한 일일지라도)은 대충하지 않는 법”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는 일이야말로 가장 진지한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성경읽기는 단순히 영적 지식이나 정보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구원과 삶의 변화를 위한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성경을 발리 읽으려 했다면 읽기 방식을 바궈야 합니다. 다른 책이든 성경이든, 빨리 읽으면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합니다. 빨리 읽으면 많은 것을 놓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지금까지 성경을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 읽지 못했다면, 성경 읽는 자세를 고쳐야 합니다. 빨리 읽기에서 천천히 읽기로, 부주의한 읽기에서 주의 깊은 읽기로 전환을 시도해야 합니다. 이런 전환을 통해 우리는 성경에서 저자가 기록한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고, 그 저자를 통해 하나님이 진정으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앞으로는 성경을 읽을 때 본문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 본문의 방식대로 주의를 기울여, 반복해서, 천천히 읽어야 하겠습니다.
2. 하나님의 마음저자의 마음저자의 의도에 따라 읽기
성경읽기와 저자의 의도
성경 본문에서 저자의 의도(목적)를 찾아야 하는 까닭은 “의식적으로 우리 자신으로부터 성경으로, 우리의 관심으로부터 그 저자의 관심으로, 우리 자신으로부터 성경으로, 우리의 관심으로부터 그 저자의 관심으로, 우리 자신의 목적들로부터 그 저자의 목적으로, 주의를 돌리려는 데”있습니다. 성경 저자의 의도를 존중하고 그에 맞게 본문을 읽을 때에만, 주관적인 방해물들을 제거할 수 있고,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시려는 바를 제대로 들을 수 있습니다.
모든 저자는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독자에게 전달하려는 생각이나 목적이 없다면 작품이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자기 생각을 독자들에게 전달함으로써 뜻한 바를 이루고자 합니다. 자기 생각을 정확하게 전달하려고 단어 하나, 표현 하나에까지 신경을 씁니다. 따라서 독자는 글이나 작품을 대할 때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바른 자세이며 저자에 대한 예의입니다. 저자의 의도에 맞게 글을 읽어야 자기 좋을 대로 읽거나 자기중심적으로 읽는 문제를 피할 수 있습니다.
성경 저자들도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그들은 독자들을 위해 특별한 메시지를 기록했고, 그 메시지를 통해 무엇인가를 성취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이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기록 목적 또는 의도입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의 의도(목적)는 독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요 20:31), 누가는 데오빌로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누가복음을 기록했고(눅 1:3-4), 유다는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고 권할 의도로 유다서를 섰습니다(유 3절). 잠언서 기자 솔로몬은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고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어리석은 자를 슬기롭게 할 목적으로 잠언을 기록했습니다(잠 1:2-5).
그렇다면 성경 저자의 의도를 존중하고 그 의도에 맞게 성경을 읽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성경 저자가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게 듣고, 그가 전달하려는 의미를 포착하는 것이야말로 본문 읽기의 중대한 목표입니다. 성경 본문을 바르게 읽었는지의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바로 저자의 의도입니다. 다시 말해, 저자의 의도와 일치하는 본문 해석이 타당한 해석입니다. 저자의 의도는 해석의 상대성이라고 하는 망망한 대해에서 일종의 나침반 같은 역할을 합니다. 만일 성경 저자의 의도를 무시하거나 배제한다면, 독자는 저마다 자기 좋을 대로 성경을 읽을 것이고 누구의 해석이 옳은지 판단할 수 있는 근거도 사라질 것입니다. 요컨대, 성경 저자의 의도를 무시하거나 배척하는 것은 “해석의 타당성을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하고 강력한 규범적 원리를 거부하는 것”이며, 필연적으로 “성경해석의 죽음”을 초래합니다.
독자가 본문의 의미를 결정한다?
성경을 단순히 문학 작품으로 간주한다면 저자가 의도한 바를 묻지 않고 독자가 마음대로 읽고 자기 방식대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시편처럼, 성경이 문학적 요소들을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독자들을 초청하는 문학 작품이 아니라 독자들에게 응답을 요청하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담은 거룩한 경전입니다. 성경 본문의 의미는 독자가 산출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 저자들을 통해 부여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경전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독자 중심적인 해석 방법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성경 저자들은 하나님의 대언자로서 문법, 구문, 단어 등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성경 저자들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들의 의도는 하나님의 의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 본문을 읽음으로써 인간 저자의 의도를 알 수 있고, 인간 저자의 의도를 앎으로써 하나님의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저자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의 기록 의도를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를 무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더구나 인간 저자들은 존재하지 않지만, 그들을 불러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은 여전히 성경의 궁극적인 저자로 존재하시면서 본문의 의미를 통제하십니다. 하나님은 변덕스럽지 않으시며 시간의 제약도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의도하신 성경 본문의 의미도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 저자가 기록한 본문을 통해 본래의 독자들에게 말씀하셨듯이, 동일한 본문을 통해 오늘의 독자들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인간 저자들을 불러 성경을 기록하게 하실 때 본래의 독자들뿐만 아니라 미래 독자들도 염두에 두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바르게 읽고 해석하고자 한다면 성경을 시나 소설과 같은 문학 작품이 아니라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거룩한 경전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본문의 의미를 결정하신다는 것을 인정하고, 자기 생각을 본문에 집어넣어 읽을 것이 아니라 본문에서 성경 저자가 의도한 의미를 겸손하게 찾아내야 합니다. 이것을 성경읽기의 일차적인 목표로 삼아야 주관적인 요소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성경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1:7-11
마가복음 11:7-11에서 하나님이 마가를 통해 말씀하시려는 것은 무엇일까요? 본문을 주의 깊게 읽으면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이 핵심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 자란 말이나 나귀를 타고 위풍당당하게 입성하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굳이 어린 나귀를 타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병행 본문인 마태복음 21:4-5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스가랴의 예언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스가랴는 장차 메시아가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 9:9). 메시아가 나귀 새끼를 타는 것은 그분이 겸손하고 온유한 평화의 왕이심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으로써 자신이 스가랴의 예언을 성취하는 메시아, 즉 온유함과 겸손함으로 백성들을 다스릴 평화의 왕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셨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평화의 통치를 위해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막 10:45)로 내어 주실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자들이 예언한 바로 그 메시아이지만, 이방 세력들과 불의한 통치자들을 물리치고 유대 민족에게 정치적 자유와 물질적 풍요를 가져닺는 군사적 영웅이 아니라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내어 주는 평화의 왕이십니다. 이 점을 독자들에게 알려 주는 것이 마가의 의도이자 하나님의 의도였습니다. 하나님은 오늘의 독자들에게도 동일한 사실을 알려 주고자 하십니다.
누가복음 15:1-7
“나와 함께 즐기자”라는 구절은 잃은 양을 찾은 목자가 벗들과 이웃들에게 한 말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인생을 즐겨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목자가 잃은 양을 찾고 즐거워한다는 뜻입니다. 저자의 의도를 무시한 채 자기중심적으로 이 비유를 읽으면, 긍정적인 인생관을 갖게 되거나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려는 것은 들을 수 없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삼위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없이 지내는 일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잃은 양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죄인이 회개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비유의 결론에서 분명하게 밝히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7). 잃은 양 비유를 읽는 사람들은 죄인이 회개할 때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창세기 18:22-33
창세기 저자에게는 이 본문을 통해 아브라함보다 끈질기게 기도해야 한다는 교훈을 전할 의도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끈질긴 간청을 신자들을 위한 본보기로 제시하는 것도 그의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창세기 저자는 아브라함의 끈질긴 간청보다 그의 간청을 들어주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오래 참으심을 더 강조합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면서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그의 두 딸을 건져 주셨습니다. 또한 창세기 저자는 죄악이 심히 무거운 소돔과 고모라 성을 하나님이 심팜하신 사건을 기록함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독자들에게 알리고자 합니다.
요한복음 6:1-15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행동이 항상 신자를 위한 규범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 저자가 어떤 인물의 행동을 신자를 위한 규범으로 제시하는지 신중하게 살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성경 인물의 특정 행동을 저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자기 목적에 맞추어 오용하거나 자기 행동의 근거로 삼을 수 있습니다.
느낌과 직관에 의존한 읽기 방식을 버린다.
자기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본문의 문장 하나하나에 집중하면서 성경 저자가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말씀을 찾아야 합니다. 자기 마음에 와 닿은 구절이 저자가 전달하고자 한 말씀과 일치한다면 그 구절은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성령님 자신이 인간 저자들을 감동시키셨기 때문에, 그들의 의도를 존중하십니다.
자신의 생각과 목적을 내려놓는다.
자기 관심과 생각과 목적을 내려놓고 본문을 읽어야만 성경 저자가 본문에서 말하려는 것을 들을 수 있고, 저자가 성취하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성경 저자가 말하려는 것은 독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메시지이며, 성취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 혹은 의도입니다. 그들의 궁극적인 의도는 독자들에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고 독자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순종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성경 저자들은 독자들이 이미 아는 것을 확신하게 만들고자 하며, 잘못된 행실들을 지적하고 회개하게 만들고자 합니다. 때로는 위로하고 격려함으로써 거룩한 삶을 살게 만들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 자기 관심과 생각과 목적을 내려놓고 저자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주의 깊게 살펴야 하며, 또한 저자가 그것을 말함으로써 무엇을 성취하고자 하는지 질문해야 합니다.
본문의 중심적은 요소들에 주목한다.
많은 사람이 본문에 나오는 단어와 구절 하나하나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본문에서 수십 가지 교훈이나 메시지를 끌어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는 성경 본문을 자기중심적으로 읽는 것을 무한히 허용하는 잘못된 주장입니다. 성경 계시의 전체적인 틀 안에서 볼 때 모든 단어와 구절이 의미를 지닌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어와 구절마다 하나님이 의도하신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단락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전달하는 구절들과 문장들이 있는 반면, 이차적이며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것들도 있습니다. 대체로 이차적이며 보조적인 구절에서 얻은 영적인 교훈과 유익은 성경 저자나 하나님이 의도한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도를 찾으려면 중심적인 구절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저자의 기록 목적을 고려한다.
저자의 기록 목적은 사실상 의도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 저자들은 “이것을 쓰는 것은...하려 함이라”(요일 5:13) 또는 “이는...하려 함이로라”(눅 1:4)라는 식으로 기록 목적을 밝힙니다. 아래 본문에서 볼 수 있듯이, 사도 요한은 구문 형식으로 자신의 저작 목적을 진술합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이 본문에서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이 두 가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한 가지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로 믿게 함으로써 그를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읽을 때 이 기록 목적에 따라 예수님을 주목하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이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 저자들은 책의 기록 목적뿐 아니라 단락이나 본문의 목적을 밝히기도 합니다. 이 경우에도 “이는...하려 함이라”(빌 2:15-16; 살전 4:13) 또는 “내가 이것을 말함은...하려 함이니”(골 2:4; 요일 2:1)라는 문구로 표현합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4:13에서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는 문구로 예수님의 강림과 죽은 자들의 부활에 관한 단락(13-18절)의 목적을 밝힙니다. 바울이 급히 떠난 뒤에 데살로니가 교인들 중에 죽는 자들이 있었고, 다른 교인들은 그들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죽은 자들은 영광에 참여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서 죽은 자들의 미래에 관해 언급합니다. 죽은 자들은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강림하실 때 먼저 일어날 것이고, 그때까지 살아남아 있는 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영접하게 될 것입니다(16-17절). 바울이 이런 교훈을 제시하는 목적은 데살로니가 교인들로 하여금 소망 없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13절). 바울은 단락의 마지막 절에서 이 점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18절).
본문의 내용과 문맥을 살핀다.
대체로 성경 저자들은 반복된 표현이나 진술로 의도를 표현하며, 구체적인 명령이나 권고에 자신의 마음을 담기도 합니다. 본문에 반복된 표현이 없거나 구체적인 명령과 권고가 없는 경우에는, 먼저 본문의 요점을 파악하고 그것을 말하는 저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질문해야 합니다. 이어서 단어와 구문의 의미를 파악하고 문맥을 주의 깊게 관찰하면서, 저자가 교훈을 제시하려고 하는지, 잘못을 책망하여 회개하게 만들려고 하는지, 위로하려고 하는지 등을 결정해야 합니다.
저자의 의도에 따라 읽기
많은 사람이 성경의 의도를 따르는 대신 자신의 선입관과 피상적으로 일치하는 것처럼 보이는 요소를 찾는다. 이러한 요소들을 발견한 후에, 독자는 그것을 문맥에서 떼어내 자신의 체계에 뜯어 맞춘다. 반면에 책임 있는 독자들은 겸허한 독자들이다. 그들은 자기가 발견하고 싶은 것을 성경 안에서 찾으려는 야심을 버린다. 그들은 그들이 다루고 있는 의미 체계에 복종한다. 그들은 성경과 그 뒤에 서 계신 하나님께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라고 여쭈어 본다.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가르쳐주십시오. 만일 어제 이해했다면, 오늘은 그것을 확증하게 해주십시오. 어제 오해했다면, 오늘은 그것을 고치게 해주십시오.”
제임스 사이어
성경에서 자기가 듣고 싶은 것을 찾으려는 생각을 버리고 본문의 의미를 겸손하게 하나님께 묻는 자세와 본문을 잘못 이해한 경우에 즉시 고치는 자세, 바로 이것이 성경을 저자의 의도에 따라 읽는 책임 있는 독자의 자세입니다. 이런 자세로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고 그 의도에 맞게 성경을 읽어야만 본문의 의미를 바르게 깨달을 수 있고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목적이나 생각에 따라 계속 자기중심적으로 성경을 읽는다면, 저자의 의도를 무시하게 되고 성경을 침묵하게 만들 것입니다. 또한 성경에서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자기에게 친숙한 것만 읽을 뿐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듣지 못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과의 소통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과의 소통이 없으면 영적 변화와 성숙도 불가능합니다. 진정한 변화와 성숙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읽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성경에서 저자가 말하고자 의도한 것을 충실하게 듣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삶에 혁명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3. 하나님 우선예수님 우선하나님 중심적으로 읽기
성경은 믿음의 영웅 열전인가?
성경은 믿음의 영웅 열전이나 영웅 내러티브가 아닙니다.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이 등장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성경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책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승리에도 개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통해 블레셋을 물리치시고 블레셋과 골리앗의 손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승리는 하나님 자신의 승리를 증언하며, 더 나아가 하나님이 사울 왕을 폐하시고 다윗을 이스라엘의 통치자이자 구원자로 세우실 것을 예고합니다. 이런 점을 무시하고 다윗 개인의 믿음과 승리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그것은 다윗 내러티브를 믿음의 영웅 이야기로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인간 중심적 읽기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그들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어 본문을 읽고 해석하는 방식을 인간 중심적 접근(anthropocentric approach)이라고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성경을 읽으면 성경의 인물을 신자들을 위한 믿음의 행위의 모범으로 취하게 됩니다. 이것은 위인들의 전기를 읽고 그들의 삶에서 교훈을 얻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에서도 사람들이 중심 무대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고 그들의 삶에 교훈적인 요소들이 있기 때문에 인간 중심적 읽기가 힘을 얻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의 진정한 주인공이신 하나님을 제쳐 두고 등장인물 중심으로 성경을 읽는 것은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첫째, 성경을 도덕적인 지침서처럼 취급할 위험이 있습니다.
둘째, 인간 중심적인 성경읽기는 공로주의나 율법주의를 조장할 수 있습니다.
셋째, 성경의 하나님 중심적 초점을 무시하게 됩니다.
성경은 근본적으로 하나님 중심적인 책입니다. 시종일관 하나님 중심적인 관점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하심을 증언합니다. 성경 이야기에서 때때로 사람들이 중심 무대를 차지하기도 하지만 그들의 궁극적인 역할은 하나님을 드러내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그들과 더불어, 그들을 통해 무엇을 행하시는지를 보여 주려고 등장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 중심적인 차원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사람들과 그들의 행위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영광을 보지 못할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에 관해서도 제대로 알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적 읽기
인간 중심적 읽기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 중심적 읽기(theocentric reading)입니다. 이것은 성경 본문, 특히 역사 본문을 하나님과 그분이 행하신 일에 초점을 맞추어 읽는 방식입니다. 성경을 하나님 중심적으로 읽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 저자들을 불러서 기록하게 하신 책입니다. 따라서 인간 저자들이 인간의 말로 기록했음에도 성경의 궁극적인 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인간 저자들 안에서 그들을 통해 말씀하셨고, 지금도 그렇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뜻과 메시지를 분별하려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하나님 중심적으로 읽어야 합니다.
성경을 하나님 중심적으로 읽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성경이 근본적으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기록하고 있고, 하나님 자신이 성경의 궁극적인 주인공이시므로 성경을 하나님 중심적 관점에서 읽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하나님이 구원 드라마의 무대에 직접 등장하지 않으실 때도 인간들의 행위를 통해 또는 인간들의 행위 뒤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을 하나님 중심적으로 읽어야 하는 이유는 성경의 궁극적인 목적 때문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실 뿐만 아니라 타락한 세상을 회복하시고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삼위 하나님을 증언합니다. 성경의 목적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알려 주는 데 있습니다. 성경을 떠나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을 통해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분명히 드러나지만(롬 1:20), 자연 세계에서 얻을 수 있는 지식은 매우 제한적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자기 계시인 성경을 통해서만 삼위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일차적인 목적도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아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 중심적 읽기
복음서는 예수님 우선적 관점으로 읽어야 합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좋은 소식을 역사적 방식으로 기록했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삶과 사역과 죽음과 부활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의 출발점은 예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이며, 전환점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이며(마 16:13-20; 막 8:27-30; 눅 9:18-21; 요 6:68-69), 절정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모든 복음서 이야기의 중심이자 주인공이십니다. 예수님은 임마누엘, 곧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분은 사람이 되셨고 사람들 가운데 계셨으며 사람들을 위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또한 복음서의 목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고 그분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는 데 있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복음서는 예수님에 관한 구속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믿음의 반응과 헌신을 요구합니다. 복음서의 인물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드러내기 위해, 즉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그분의 사랑과 긍휼을 보여주기 위해 등장합니다. 따라서 복음서를 예수님 우선적 관점으로 읽고 등장인물들을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올바른 읽기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초점을 맞추어 읽기
하나님 중심적 접근 방식은 성경의 역사 본문을 읽을 때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초점을 맞춥니다. 성경 자체가 창조, 타락, 구속, 완성이라는 네 장으로 구성된 구원 드라마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자기 형상대로 창조하신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 거주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적이 등장해 하와를 미혹했고, 아담과 하와는 결국 하나님을 반역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의 자손을 애굽에서 건져내어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이렇게 만물을 회복하시고 죄인들을 구속하시는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장차 악의 세력을 심판하시고 만물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계 21-22장), 요컨대, 성경은 창조와 함께 시작되고 이스라엘의 역사와 함께 진행되며,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서 그 정점에 이르고, 궁극적으로 새 창조와 함께 완성되는 거대 내러티브, 즉 장엄한 구속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라는 사실을 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개인의 문제에 관한 지침을 제공하는 책이나 윤리 교본, 또는 성공적인 삶을 위한 안내서처럼 생각합니다. 성경이 인생의 길잡이가 되고, 윤리적 지침을 제시하고 인간 존재의 의미에 관한 열쇠를 제공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이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상세히 기술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옛 창조부터 새 창조에 이르기까지 점진적으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진술하는 책임을 인식하고, 성경 본문을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라는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이 하나님 중심적 읽기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모든 성경 본문은 거대 내러티브, 즉 장엄한 구원 이야기의 한 부분입니다. 구약성경의 모든 개별적인 내러티브는 이스라엘의 역사라는 큰 내러티브의 한 부분이고, 이것은 다시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이라는 궁극적인 내러티브의 한 부분입니다. 이 궁극적인 내러티브가 구약성경을 넘어서 신약성경을 관통하는 구속의 거대 내러티브 또는 구속사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개별적인 내러티브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이스라엘의 역사와 구원 이야기라는 성경 전체의 넓은 맥락을 고려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이야기체로 서술된 역사 본문을 읽을 때 구원 이야기의 전체맥락 안에서 그 의미를 발견해야 하며, 동시에 자기 백성의 구속을 위해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셨는지 세심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본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거대한 구원 드라마 속에서 수행하는 역할이 무엇인지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스도 중심적 읽기
구약성경의 역사 본문에 대한 하나님 중심적 읽기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적 읽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성경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꼐 순종하는 것은 곧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을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읽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구약성경 자체가 예수님에 대해 증언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 5:3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하신 후 예수님은 엠마오 도상에서 만난 두 제자에게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눅 24:27)하셨습니다. 그날 저녁 부활한 자신의 모습을 보고도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눅 24:4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성경이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구약성경의 모든 개별 구절이 직접적으로 예수님에 관한 것이거나, 모든 본문에서 예수님의 사역과 죽으심과 부활을 찾아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많은 예언을 포함한 구약성경 전체가 예수님을 계시하며 그분의 구속과 통치를 내다보고 있음을 의미할 따름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모든 내용이 향하고 있는 정점과 같으며, 구약성경은 예수님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가는 대항해와 같습니다.
4. 문맥은 해석의 왕문맥 안에서 읽기
하나님은 성경 본문의 본래 상황과 문맥을 무시하시지 않습니다. 자신의 백성을 인도하실 때도 본문 자체의 자연스러운 의미를 존중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인도는 성경 본문을 바르게 이해하고 적용하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특정 구절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구절이 속한 단락이나 장 전체를 통해서 자신의 뜻을 알려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알려면 그 구절이 속한 본문 전체를 읽어야 합니다.
성경은 문맥이 없는 신탁 모음이나 서로 무관한 구절들의 모음이 결코 아닙니다. 성경의 모든 단어와 구절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하나의 일관된 전체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성경을 읽더라도 문맥을 무시하면 본문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성경의 한 본문을 문맥에서 분리하여 읽는 것은 영화의 한 장면만 때로 떼어서 보고 등장인물의 성격이나 영화 전체의 메시지를 파악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의 문맥을 무시하는 것이 도를 넘으면 본문의 의미를 심각하게 왜곡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정당화할 수 있습니다.
문맥이란 무엇인가
본문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인접 문맥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하며, 가까운 문맥으로부터 시작해서 점차 먼 문맥을 고려해야 합니다. 대체로 (1) 본문 앞뒤의 인접 문맥, (2) 단락, (3) 본문이 속한 장, (4) 본문이 속한 책, (5) 구약 또는 신약성경, (6) 성경 전체의 순으로 문맥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성경읽기와 문맥의 중요성
문맥이 중요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첫째, 의미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의미의 범주를 지닌 단어라 하더라도 문맥 안에서는 한 가지 의미로 사용됩니다.
요한복음 3:5-8
5.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으로 난 것은 이니 7.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8.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프뉴마’(pneuma) = 바람, 호흡, 인간의 영, 영적 존재, 성령
둘째, 문맥은 본문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본문의 문맥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오류와 실수를 피할 수 있습니다.
셋째, 문맥이 중요한 까닭은 저자의 사고의 흐름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문장들을 논리적으로 연결하고 문단들을 구성하여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합니다. 여러 개의 문장이 모여서 하나의 단락을 형성하고, 다시 여러 개의 단락이 모여서 하나의 장을 형성합니다. 이때 문장들과 단락들을 하나로 묶어 글 전체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것이 바로 저자의 의도와 일관된 사고입니다. 저자의 사고는 문장들과 문단들을 통해 흘러가는 하나의 물줄기와도 같습니다. 저자의 생각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중심 문장이 있는 경우에는 그것만 보아도 저자가 말하는 바를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장은 어디까지나 단락이나 장을 구성하는 부분이며 저자의 사고라는 전체 물줄기의 일부분입니다. 따라서 저자의 생각이 어디에서 시작되고 어떻게 전개되며 어떻게 결말에 이르는지 알려면 한 문장이 아니라 단락과 장 전체를 읽어야 합니다.
문맥 안에서 읽기
문맥 안에서 본문을 읽는다는 것은, 성경의 각 단어를 그 단어가 위치한 구절 안에서 읽고, 각 구절을 그 구절을 담고 있는 단락 안에서 읽고, 각 단락을 그 단락이 속한 장 안에서, 각 장을 그 장이 속한 책 안에서 읽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본문의 한 부분이나 한 구절을 독립된 것으로 읽지 않고 앞뒤 부분과 함께 읽는 것을 뜻합니다. 문맥 안에서 본문을 읽을 때는, 먼저 본문이 앞뒤 부분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살펴야 하고, 이어서 그 앞뒤 부분에서 저자가 무엇을 말하고 있으며 그것이 본문을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주는지를 파악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본문이 속한 장과 책 전체를 읽고 줄거리나 흐름을 파악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본문이 어느 위치에 있으며 무엇과 연관되어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문맥과 본문을 조화롭게 읽기
성경 읽기와 해석에서 문맥이 중요하지만, 본문을 문맥에 일방적으로 예속시키거나 문맥의 특정 요소를 본문 안으로 무리하게 끌어들일 경우에는 본문의 의미를 왜곡하게 됩니다. 본문과 문맥의 관계는 어느 한쪽에 일방적인 것이 아닙니다. 문맥을 알아야 본문을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본문의 내용을 알아야 문맥 전체의 흐름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문맥 안에서 본문을 읽는 과정은 본문과 문맥 모두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선 본문 자체를 주의 깊게 읽고 내용을 이해한 다음 문맥을 살펴보고, 본문으로 돌아와 문맥을 고려하여 본문을 다시 읽으면서 의미를 파악해야 합니다.
문맥 안에서 본문 읽기의 순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을 주의 깊게 읽으면서 내용 이해하기 --> 문맥을 세심하게 살펴보기 -->
문맥 안에서 다시 본문 읽기 --> 문맥을 고려하면서 본문의 의미를 파악하기
5. 오래된 본문그러나 살아 있는 말씀역사적 문화적 배경에 비추어 읽기
이 무렵에, 참으로 그를 사람이라고 불러야 한다면, 예수라는 지혜로운 사람이 있었다. 그는 놀라운 일들을 행했으며 기쁜 마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스승이었다. 수많은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이 그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그가 바로 그리스도였다. 그리고 우리 유대인 중 유력 인사들이 그를 고소하자 빌라도는 그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를 사랑하던 사람들은 그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삼 일 만에 다시 살아나서 그들에게 나타났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그에 관해서 이것들뿐만 아니라 다른 수많은 놀라운 일들을 예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따라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무리들이 지금까지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유대고대사’
요세푸스의 저작들은 신약성경의 많은 인물과 사건에 관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예를 들어, 빌라도와 베스도와 벨릭스와 같은 로마 총독들, 헤롯 대왕과 그의 아들 아켈라오와 헤롯 안티파스와 빌립과 같은 유대 통치자들,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와 클라우디우스와 같은 로마 황제들, 안나스와 가야바와 아나니아와 같은 대제사장들이 등장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예수님에 관한 증언과 함께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의 순교에 관한 기록도 나옵니다. 또한 분봉 왕 헤롯 안티파스가 자기 형제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하고 그 일을 비판한 세례 요한을 처형한 사건도 언급합니다. 요세푸스는 세례 요한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의를 행하면서 경건하게 살라고 외친 의인으로 기술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의 증축 과정과 구조와 규모에 관해서, 그리고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와 에세네파 등에 관해서도 중요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런 점에서 요세푸스의 저작들을 종종 신약성경의 역사적 부록이라고 합니다.
요세푸스의 저작들에 신약성경의 인물들과 사건들이 등장하는 것은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종종 가볍게 여기거나 무시하는 한 가지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그것은 신약성경이 1세기 유대와 로마제국의 역사를 배경으로 기록된 문헌이라는 점입니다. 신약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증언하고 시공간을 초월하는 구원의 진리를 알려 주지만, 하나님의 구속 사역은 진공 상태에서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숨을 쉬고 생활한 구체적인 역사 현장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누가는 예수님이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통치할 때 유대 땅에서 탄생하셨고, 티베리우스가 통치할 때 사역을 시작하셨으며, 분봉 왕 헤롯이 갈릴리를 통치하고 로마 총독 빌라도가 유대를 통치할 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음을 분명하게 기록했습니다. 또한 그는 사도들이 로마제국의 황제 클라우디우스와 네로가 통치하던 시기에 유대와 사마리아에, 그리고 소아시아와 그리스 지역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사실도 기록했습니다. 신약성경의 다른 저자들도 하나님의 구원 사건과 사도들의 복음 사역이 1세기 유대와 로마제국의 역사를 배경으로 일어났음을 분명하게 증언합니다.
역사적인 성격이 뚜렷한 복음서들과 사도행전뿐만 아니라 서신서들도 당대의 역사적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서신서의 저자들은 당대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상황에서 독자들이 직면한 문제들을 다루고자 서신서를 기록했습니다. 따라서 서신서에는 그 시대의 역사와 함께 독자들의 상황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교리 서신으로 알려진 로마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서신에서 바울은 이신칭의에 관한 교리적 진리를 설명함과 동시에 로마 교회의 실제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 사이에 일어난 갈등과 분열의 위기입니다(롬 14:1-15:13). 로마서의 기록 목적 중 하나는 두 집단을 화해시킴으로써 로마 교회의 하나 됨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모세 율법과 이신칭의에 대한 이해는 신자들의 구원뿐만 아니라 로마 교회의 연합을 위해서도 중요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종말에 일어날 일들을 기록한 책으로 알려진 요한계시록도 1세기 말 로마제국의 아시아 속주에 살던 성도들을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한 일종의 상황 서신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이 당대의 역사와 상황을 반영한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요컨대, 신약성경은 과거의 특정한 시점에서 일어난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에 관한 기록이자 사도들과 그들이 설립한 교회들에 관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성격을 지닌 문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 또한 고대 근동과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사역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사울과 다윗과 솔로몬 등 이스라엘의 왕들만이 아니라 이집트와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 제국의 왕들도 등장합니다. 이스라엘과 주변 국가들 사이에 일어난 전쟁들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대 근동과 이스라엘의 역사와 사건들과 인물들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구약성경도 역사적 문헌인 것입니다. 역사서로 분류되는 책들뿐만 아니라 예언서와 시편 같은 책들도 역사적 성격을 지닌 문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언서들은 예언자들이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 전한 하나님의 말씀들을 모든 것이며, 시편은 경건한 성도들이 자신들이 처한 특정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올려 드린 찬송과 기도 등을 모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고대 역사 속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관한 기록인 동시에 고대 세계에서 일어난 사건들과 그 세계에서 살았던 사람들에 관한 기록입니다.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고려한 읽기
성경이 역사적 성격을 지닌 문헌이라는 사실이 오늘의 신자들에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성경을 읽을 때 반드시 역사적이며 문화적인 배경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경을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지역에 살던 사람들을 위해 특정한 언어로 기록하게 하셨기 때문에, 성경의 모든 본문은 역사적 문화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본래 독자들은 1세기의 팔레스타인과 그리스-로마 문화권에 속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었고, 구약성경의 본래 독자들은 고대의 근동 문화권에 속한 팔레스타인 지역에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과 오늘의 독자들 사이에는 매우 넓은 역사적이며 문화적인 간격이 존재합니다. 그 간격을 뛰어넘어 성경 본문의 원래 의미를 파악하려면 반드시 성경 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의 영원하고 보편적인 메시지도 그것이 주어진 본래의 역사적 문화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파악할 수 없습니다.
세 명의 헤롯
베들레헴과 그 가까운 지역에 있는 두 살 이하 사대아이들을 죽이라고 명령한 헤롯 (마 2:1-3, 16-18)
이두매 출신, 30년 이상 유대를 통치한 헤롯 대왕(Herod the Great, 주전 73-4)성전을 크게 증축하고 항구도시 가이사랴를 건설
세례 요한을 처형한 헤롯 (막 6:14-29)
헤롯 대왕의 아들, 갈릴리와 베레아를 통치한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 주전 20-주후 39). 로마에 거주하던 이복형제 빌립(Herod Philip Ⅰ)의 아내인 헤로디아에게 마음을 빼앗겼고, 결국 본처를 버리고 그녀와 재혼.
야고보를 참수하고 베드로를 옥에 가두었다가 벌레에 먹혀 죽은 헤롯 (행 12:1-3, 20:23)
헤롯 대왕의 손자이자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친구인 헤롯 아그립바 1세(Herod Agrippa Ⅰ, 주전 10-주후 44). 그의 아버지는 헤롯 대왕과 하스몬 왕조의 마지막 공주인 마리암메 1세 사이에서 태어난 아리스토불루스 4세(Aristobulus Ⅳ, 주전 31-7)다. 그는 칼리굴라 황제와 클라우디우스 황제와의 친분 덕에 유대 땅 전체를 다스리는 왕이 되었다. 남편을 버리고 헤롯 안티파스와 재혼한 헤로디아가 그의 누이이다.
지리적 배경
경제적 배경
본래의 독자를 고려한 읽기
성경이 역사적 성격을 지닌 문헌이라는 사실과 관련하여 한 자기 중요한 점은 성경의 본래 독자는 오늘의 우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구약성경의 본래 독자들은 고대 근동 문화권에 속한 팔레스타인의 이스라엘 사람들이었고, 신약성경의 본래 독자들은 팔레스타인과 그리스-로마 문화권에 속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로마서의 본래 독자들은 1세기 중반에 로마에 거주하던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디모데전서의 본래 독자는 에베소에서 목회하던 젊은 사역자 디모데였습니다. 따라서 이 서신서에 나오는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는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딤전 5:23)는 권면은 일차적으로 디모데를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전에 본래의 독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의 모든 본문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되기에 앞서 다른 민족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성경은 다른 시대, 다른 지역에서 살았던 사람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원래 독자들에 대해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으셨고, 단순히 그들을 사용해서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시려고 했다고 생각할 정도로 우리가 교만하거나 자만에 가득차서는 결코 안됩니다.
하나님은 특정한 역사적 문화적 상황 속에서 본래의 독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사소통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개달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처음 받은 독자들이 누구이며, 또 그들이 어떤 상황에서 그 말씀을 받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단지 우리를 과거의 인물들과 사건들에 연관시키는 지난 긴 역사에서 비롯된 책도 아니다. 성경은 결코 메마른 이야기도 옛날 연대기도 아니며, 항상 살아 있고 영원하고 신선한 말씀으로, 하나님이 현재 이 시간, 항상 자기 백성에게 주는 것이다. 성경은 항상 계속하여 우리에게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단지 우리에게 과거에 무슨 일이 발생했었는지를 역사적으로 알려 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성경 안에서 매일 자기 백성에게 다가온다. 하나님은 그 안에서 자기 자녀들에게 말씀하시되, 멀리서가 아니라 가까이서 말씀한다. 하나님은 성경에서 날마다 신자들에게 은혜와 진리의 충만함으로 자신을 계시한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자신의 자비롭고 신실한 기적들을 행한다. 성경은 하늘과 땅,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 하나님과 그의 자녀들 사이의 지속적인 친교다. 성경은 우리를 단지 과거에 연락할 뿐만 아니라, 하늘의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 묶는다. 성경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음성이며, 자신의 피조물들에게 보내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편지다.” - 헤르만 바빙크
오늘의 독자를 위한 교훈 찾기
항상 살아 있고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모든 시대에, 모든 사람에게 계속해서 역사합니다. 하나님이 본래의 독자들을 위해 기록된 성경을 통해, 성경 안에서 여전히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방식은, 앞에서 지적한 대로, 성경을 읽는 사람들에게 본문에 담겨 있는 보편적인 교훈이나 원리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본문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본문을 당대의 역사적이며 문화적인 상황에 비추어 읽는 단계를 거쳐 하나님이 그 본문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찾는 단계에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성경 본문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교훈은 몇 가지 기준을 충족시키는 것이어야 합니다. 첫째, 본문의 의미에 반영된 것이어야 합니다. 둘째, 특정한 역사적 상황이나 문화적 관습을 넘어선 보편적인 거싱어야 합니다. 셋째, 성경의 다른 부분들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어야 합니다. 넷째, 성경의 본래 독자와 오늘의 독자 모두에게 의미가 있고 연관성이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 네 가지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첫 번째 기준입니다. 본문에서 찾아낸 교훈이 아무리 유익한 것이라 하더라도 성경 저자가 의도한 본문의 의미와 일치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성경적 교훈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교훈은 적어도 성경 저자의 의도에 근거하거나 그것과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찾기 전에 성경 본문을 본래 독자들의 역사적 문화적 상황에 비추어 읽고 저자가 의도한 본래의 의미를 신중하게 파악해야 합니다.
6. 문자는 문자로상징은 상징으로
저들은 말하기를 “성경은 비옥하다. 그래서 성경이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나는 성경이 모든 지혜의 근원이며, 지극히 풍성하며 다함이 없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나는 성경의 풍성함이 아무나 제 마음대로 염출해 내도 괜찮은 해석상 다양함을 허용하는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성경의 참 뜻이 단순 소박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단순 소박한 의미를 받아들여 그것을 굳게 지키도록 해야 한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멀어지게 하는 그런 허구적인 해석 같은 것은 다만 의심스럽기 때문에 그것을 취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위험한 퇴폐물이기 때문에 대담하게 배척해야 한다. - 존 칼빈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난 사람은 타락한 인간을 가리키고,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님을 의미한다.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를 만난 사람의 상처에 부은 기름과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를 상징한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눅 10:25-37)에 대한 어떤 설교자의 해석입니다. 그는 이 비유를 예수님의 구원에 관한 이야기로 읽고 등장인물들과 사물들에 예수님이 의도하시지 않은 영적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신 상황이나 목적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해석의 뿌리는 3세기의 가장 위대한 성경학자로 평가받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오리게네스(Origenes, 185-254)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오리게네스는 성경 본문의 문자 이면에서 영적인 의미나 신비적 의미를 찾아내는 알레고리적 해석 방법이 교회 안에 널리 확산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오리게네스는 인간이 몸과 혼과 영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성경 본문도 삼중적인 의미(문자적 의미, 도덕적 또는 비유적 의미, 영적 의미)를 지녔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겨자씨 비유(막 4:30-32)에서 겨자씨의 문자적 의미는 실제 겨자씨이며, 도덕적 의미는 믿음이며, 영적인 의미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오리게네스는 알레고리적 방법을 사용하여 성경 본문의 문자 이면에서 불변하는 영적 의미를 찾아내려 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첫째, 오리게네스는 리브가가 아브라함의 종을 만난 기사(창 24장)를 설명하면서, 리브가가 매일 우물에서 물을 긷고 거기서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종을 만날 수 있었고 그 결과 이삭과 결혼하게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 기사에서 리브가는 모든 신자를, 우물은 성경을, 아브라함의 종은 예언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오리게네스의 해석에 따르면, 이 기사의 영적 교훈은 리브가처럼 우리도 날마다 성경의 우물로 가서 성령의 물, 곧 하나님의 말씀을 길어야 하며, 그렇게 하면 리브가가 이삭을 만나 결혼한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를 만나 그분과 결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오리게네스는 여리고 성 함락 기사(수 6장)에서 여호수아는 예수님을, 여리고는 이 세상을 상징하며,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에 앞서 나가는 제사장 일곱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야고보, 유다, 베드로를 상징한다고 해석합니다. 그리고 기생 라합은 죄인들로 구성된 교회를, 라합이 창문에 매단 붉은 줄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를 가리킨다고 해석합니다.
셋째, 롯과 그의 딸들에 관한 기사(창 19:30-38)에서 롯은 구약의 율법을, 딸들은 유다와 사마리아를, 그의 아내를 애굽에서 먹던 생선과 오이와 파와 마늘 등을 잊지 못하여 뒤를 돌아보다 멸망당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도덕적 차원에서 롯은 이성적인 이해와 인간의 영혼을 가리키며, 그의 아내는 악을 따라가고 쾌락을 추구하는 육신을, 그의 딸들은 헛된 영광과 교만을 상징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해석에 근거하여, 오리게네스는 세상의 화염과 육신의 불에서 탈출하여 높은 지식의 경지에 도달했다 하더라도 반드시 두 딸, 곧 헛된 영광과 교만을 조심해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이러한 알레고리적 해석의 문제점은 성경 본문의 역사적, 문자적인 의미를 무시하고 본문에 없는 다른 의미를 집어넣어 읽는 것입니다. 리브가의 기사에 나오는 우물은 실제 우물이며, 여리고 성 함락 기사에 등장하는 기생 라합도 실제 인물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물이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할 수 있어며, 라합이 교회를 의미할 수 있을까요? 여리고 성 함락 기사에서 나팔을 잡은 일곱 제사장이 신약의 인물들을 가리킨다고 해석한 것은 황당하기까지 합니다. 또한 롯과 그의 딸들에 대한 해석은 오리게네스가 본문의 의미를 충실하게 설명한 것이 아니라 본문에 자신의 생각을 투사하여 읽었음을 여실히 보여 줍니다.
오리게네스가 행한 알레고리적 해석의 또 다른 문제점은 성경 저자의 의도를 무시한 것입니다. 리브가의 기사는 어떻게 이삭이 리브가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이삭을 위해 리브가를 예비하셨고, 두 사람이 결혼하여 약속의 자손의 계보를 잇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리브가의 기사를 기록한 저자의 의도는 이삭의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친히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이루어 가신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나려면 날마다 성경의 우물로 나아가야 한다는 교훈은 저자의 의도와 거리가 먼 것입니다. 여리고 성 함락 기사와 룻과 그의 딸들에 관한 해석도 성경 저자의 의도를 무시한 자의적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알레고리적 해석의 문제점
알레고리적 해석의 문제점은 성경 본문의 역사적이며 문자적인 의미를 무시하고, 본문의 문자 이면에서 저자가 의도하지 않은 ‘다른’ 의미를 찾아내는 데 있습니다. 이 방법으로 찾아낸 본문의 의미는 해석자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일 뿐,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부당한 알레고리적 방법으로는 성경 본문의 참된 의미를 알 수 없고, 하나님의 교회를 진리의 반석 위에 세울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알레고리적 방식을 허용한다면 성경은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해도 무방한 책이 될 것이고, 성경해석은 무정부 상태를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건전한 문자적 읽기
성경해석의 무질서와 혼란에서 벗어나는 길은 건전하고 바른 문자적 해석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버나드 램은 이렇게 말합니다. “실로 여기에 단 하나의 길이 있다. 문자적 성경해석에 우선권을 주라. 문자적 해석이 모든 알레고리적 혹은 신비적 성경해석의 심판자로 군림하게 하라.” 문자적 해석이야말로 성경의 바른 해석을 위한 효과적이며, 필수 불가결한 제어장치입니다. 성경 저자가 본문을 영적으로 또는 비유적으로 읽도록 의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본문을 문자적으로 읽어야 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역사적 문자적 의미를 추구했습니다. 칼뱅은 미묘하거나 억지스러운 의미가 아니라 평이하며 자연스럽고 명백한 의미를 추구했고, 루터 역시 성경의 문자적 의미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는 문자적 의미를 이렇게 규정했습니다. “성령은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지극히 소박한 저자로 나타나신다. 그러므로 그의 말씀들은 하나의 지극히 단순한 의미만을 갖는데, 이것을 우리는 성경적인 혹은 문자적인 의미라고 부른다.” 성경 연구 분야에서 종교개혁자들이 이룬 가장 중요한 진전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성경을 문자적 의미에 따라 해석해야 한다는 원리를 확립한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확립한 문자적 읽기의 원리는 성경의 은유적 표현들이나 수사적 표현들마저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기계적 문자주의와는 거리가 멉니다. 기계적 문자주의가 문자에 얽매여 성경 저자의 의도와 의사전달 행위의 역할을 무시하는 반면, 건전한 문자적 읽기는 성경 저자의 의도와 언어의 법칙을 존중합니다. 다시 말해서, 문자적 읽기란 성경 저자가 단어나 문장을 문자적으로 사용한 경우에는 문자적으로, 영적으로 사용한 경우에는 영적으로, 상징적으로 사용한 경우에는 상징적으로 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자들이 말한 문자적 의미란 영적 의미와 대조된 것이 아니라 부당한 알레고리적 의미와 대조된 것입니다. 문자적 의미는 영적 의미를 무시하거나 대체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관한 것이며,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 관한 것이라는 점에서 본문의 정당한 문자적 의미가 곧 영적 의미인 것입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이 의도한 의미이지 상상력에 근거하여 본문에서 억지로 끌어낸 영적 의미가 아닙니다. 요컨대, 건전한 문자적 읽기란 성경 본문의 단어와 문장과 문법의 일반적인 법칙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저자가 전달하고자 한 자연스럽고 명백한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비유법을 고려한 읽기
성경 저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 비유법을 즐겨 사용했습니다. 비유법이란 어떤 현상이나 사물을 직접 설명하지 않고 그와 비슷한 다른 현상이나 사물에 빗대어 표현하는 방법으로, 직유법, 은유법, 제유법, 의인법 등이 여기에 속합니다. 비유법을 사용하는 목적은 어떤 사물이나 관념을 뚜렷하고 선명하게 표현함으로써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입니다.
직유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시 42:1)
에브라임은 어리석은 비둘기같이 지혜가 없어서 애굽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앗수르로 가는도다(호 7:11)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마 3:16)
은유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6:48)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6:51)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약 3:6)
(고전 12:27)
상징을 고려한 읽기
성경 저자가 상징적으로 사용한 단어나 상징적으로 기록한 이야기는 상징적으로 읽어야 합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는다고 해서 상징이나 상징적 표현마저 문자적으로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상징이란 무엇일까요? 추상적인 관념이나 사상을 구체적인 사물이나 심상으로 나타내는 일, 또는 그렇게 나타낸 사물이나 심상을 가리킵니다. 예컨대, 백합은 순결의 상징이며,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입니다. 이는 ‘순결’이라는 추상적인 관념을 ‘백합’이라는 구체적인 사물로, ‘평화’라는 추상적인 관념을 ‘비둘기’라는 구체적인 사물로 나타낸 것입니다.
모형(예표)를 고려한 읽기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을 때 상징만큼 신중하게 고려해야 할 요소가 바로 모형 또는 예표입니다. 모형(type)이란 일반적으로 신약성경의 어떤 사건, 인물, 사물, 제도 등과 의미상 명백하게 상응하는 구약성경의 사건, 인물, 사물, 제도 등을 가리킵니다. 구원 역사의 관점에서 볼 때, 구약의 사건, 인물, 제도 등은 그와 연관이 있는 신약의 더 중요한 사건, 인물, 제도 등을 예시합니다. 이런 점에서 모형을 예표(豫表)라고도 합니다. 구약의 모형이 예시하는 신약의 사건, 인물, 사물 제도 등은 본형(antitype) 또는 대형(對型)이라고 합니다. 구원 역사에서 모형은 시간적으로 앞선 것이며 본형 또는 대형은 나중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모형과 본형 사이에는 명백한 유사성이 있지만, 본형이 모형보다 크고 중대한 의미를 갖기 마련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가장 유명한 모형은 아담입니다. 로마서 5:14에서 사도 바울은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고 했습니다. 이 본문에서 “오실 자”는 그리스도이십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아담의 본형 또는 대형인 것입니다. 아담은 옛 인류의 머리이고 그리스도는 새 인류의 머리라는 점에서 둘 사이에 모형과 본형(대형)의 상응 관계가 존재합니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반면,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생명을 얻게 된다는 점에서 모형보다 본형이 중대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불 뱀에게 물렸을 때 모세가 놋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단 것도 잘 알려진 모형의 하나입니다. 뱀에 물린 사람은 높이 달린 놋 뱀을 쳐다보면 살 수 있었습니다(민 21:6-8). 예수님은 이 사건을 모형으로 간주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5). 모세가 뱀을 든 사건은 인자이신 그리스도가 들리는 것, 곧 십자가 사건의 모형 또는 예표이며, 역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모세가 놋 뱀을 장대 위에 매단 사건의 본형 또는 대형입니다. 광야에서 뱀에 물린 사람이 놋 뱀을 쳐다보고 살았던 것처럼,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영생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광야에서 모세가 놋 뱀을 장대 위에 매단 것은 장차 이루어질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그로 인해 죄인들이 영생을 얻게 될 것을 예표하는 사건입니다.
이처럼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에 근거하여 구약의 어떤 사건이나 인물이나 제도를 신약의 사건, 인물, 제도의 모형 도는 예표로 보고, 신약의 사건, 인물, 제도를 그 본형으로 해석하는 것을 모형론적 해석 또는 예표론적 해석(typological interpretation)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구약과 신약의 사건들, 인물들, 사물들, 제도들 사이의 연결 관계를 구원 역사의 틀 안에서 찾으려는 시도입니다. 모형론적 해석은 구원 역사의 통일성을 전제로 하여 구약성경의 의미를 신약성경에 비추어 해석한다는 점에서 알레고리적 해석과 다릅니다. 알레고리적 해석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관계와 상관없이 성경의 문자적 의미 배후에 담겨 있다고 믿는 영적 의미를 찾아내는 시도입니다. 이 해석 방법은 구원 역사를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구원 역사의 기록이라기보다는 영적 교훈을 위한 하나의 지침서로 보기 때문입니다.
성경 본문의 영적 의미란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의미 또는 교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근본적으로 영이신 하나님에 관한 것이며, 또한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본문의 의미 자체가 영적입니다. 따라서 성경 본문의 단어와 문장과 단락에 대한 건전한 문자적 읽기를 무시하고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오늘의 교훈을 파악할 수 없습니다. 겸손한 자세로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본문의 앞뒤 문맥을 세심하게 살피고, 성경 저자의 의도에 맞게 단어들과 문장들의 의미를 파악할 때 비로소 본문의 영적 의미가 드러날 것입니다. 이제는 부당한 영적 읽기의 습관을 버리고 건전한 문자적 읽기로 전환해야 합니다. 이런 전환을 통해 성경에서 우리가 듣고 싶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진정으로 말씀하시는 것을 듣게 되고, 성령님이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7. 성경의 해석자는 성경성경으로 성경 해석하기
이 원리는 다음 세 가지를 의미합니다. 첫째, 의미가 불분명한 본문을 분명한 본문에 근거하여 해석하는 것이며, 둘째, 성경의 한 본문을 다른 본문들과 조화롭게 해석하는 것이며, 마지막으로, 성경의 한 본문이나 부분을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비추어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하나님이 성경의 궁극적인 저자이시며, 따라서 성경이 유기적 통일성과 일관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 것입니다.
성경의 궁극적인 저자이신 하나님께 모순이 없으므로, 그분의 마음에서 흘러나온 성경에도 모순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설령 모순처럼 보이는 본문들이 있더라도, 역사적 정황과 저자의 의도 그리고 단어들의 의미를 면밀하게 검토하면 모순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날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한 본문을 해석할 때는 다른 본문들과 조화롭게 해석해야 합니다. 또한 구약과 신약의 66권의 책들이 한 권의 책을 이루고, 성경의 다양한 이야기가 어우러져 창조와 타락과 구속과 완성이라는 하나의 이야기를 형성하기 때문에, 성경의 한 본문이나 부분을 전체의 가르침과 조화롭게 해석해야 합니다.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원리가 중요하지만, 동시에 이 원리를 오용하거나 남용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의미가 불분명한 본문을 분명한 본문에 근거하여 해석할 때는 두 본문이 본질적으로 같은 교훈과 진리를 말하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적어도 두 본문에 중요한 개념을 지닌 유사한 단어들이나 표현들이 있어야 합니다. 도한 본문 자체의 문맥과 함께 본문을 기록한 저자의 의도도 고려해야 합니다.
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창조와 타락에서부터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구현되는 구원의 완성에 이르는 성경의 드라마를 다라가다 보면 성경의 기록들이 조화를 이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모든 본문 뒤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원리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조건이 되어야 합니다.